<영화 칼럼니스트/시카고>
“위대한 극작가인 ‘셰익스피어’가 사실은 글도 모르는 문맹에다 천박한 배우였고 그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들을 실제로 쓴 사람은 당시의 귀족이었던 ‘옥스포드’ 백작이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까. 400년 전에 죽은 셰익스피어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
날 일이지요. 하지만 영국 영화 ‘Anonymous’를 보면 충분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통치 말기의 영국. 늙은 여왕은 후사가 없습니다. 차기 영국 왕을 놓고 ‘튜더’가문과 ‘쎄실’가문의 세 겨루기가 한창입니다. 궁정과 귀족들이 누리는 화려함과는 대조적으로 일반 서민들은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삽니다. 그들의 최대 오락은 극장에서 펼쳐지는 연극을 보는 것입니다.
정치와 현실을 풍자한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웃고 울고 화내고 즐거워합니다.
극단의 젊은 극작가 ‘벤 존슨’은 좋은 작품을 쓰려는 열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극단 배우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술과 여자를 밝히는 데다 발음도 시원치 않습니다.
벤 존슨은 어느 날 자신의 연극을 관람한 ‘옥스포드’가문의 ‘에드워드 드 비어’ 백작의 호출을 받습니다. 출중한 외모와 지성, 문학적 재능을 소유한 에드워드 백작은 자신이 써 놓은 각본을 벤에게 건네며 벤의 이름으로 공연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백작의 연극은 대성공을 거두고 관객들은 환호합니다. 공연 말미 극작가의 이름을 묻는 관객들에게 벤은 ‘익명의’(anonymous) 작가라고 말합니다. 에드워드 백작은 계속해서 자기의 작품을 벤에게 전해주고 뛰어난 각본 덕에 연극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합니다.
양심적인 벤이 백작의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대신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사이, 교활하고 실력없는 배우 윌리엄은 자기가 그 작가라고 발표합니다. 그 때부터 백작의 모든 걸작품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집니다.
여기서 영화는 과거로 돌아갑니다. 에드워드 백작은 어릴 때부터 예술과 문학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입니다. 에드워드가 십대의 소년이었을 때 젊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자신이 쓴 ‘한 여름 밤의 꿈’을 직접 연기로 보여줍니다. 여왕은 감성이 풍부한 미소년에게 호감을 가집니다. 아버지가 죽고 여왕의 측근인 ‘윌리엄 쎄실’ 백작이 에드워드의 후견인이 되어 그의 보호를 받게됩니다. 에드워드는 역사, 정치, 철학,외국어등 최고의 교육을 받으면서도 머릿속에서 넘쳐나는 문장들 때문에 글쓰기를 계속하다가 쎄실 백작의 강한 반대에 부딪힙니다. 결국 정치적인 쎄실의 요구에 그의 딸과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합니다.
그 후 에드워드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재회를 하고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여왕이 임신을 하자 쎄실 백작은 여왕을 시골로 보내 아이를 낳게 하고 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여왕이 자기를 버렸다고 오해한 에드워드는 홧김에 궁중의 시녀와 관계를 맺고, 출산 후 돌아 온 여왕은 에드워드의 배신에 분노해서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나중에야 여왕이
자신의 아들을 낳은 걸 알게 된 에드워드는 쎄실의 요구대로 부인에게 돌아갑니다.
여왕과 에드워드의 아들은 ‘사우스햄튼’ 백작 집안의 아들로 키워집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 내내 에드워드는 계속해서 희곡과 시와 소네트를 씁니다. 귀족의 신분으로 귀족을 까발리고 연애, 배신, 질투, 탐욕 등 인간 속성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할 수 없어서 묻어 두었습니다. 그러다 벤 존슨을 통해 세상에 내놓게 된 것입니다
에드워드는 영국을 위해 차기 왕이 여왕의 총애를 받는 ‘에섹스’ 백작이 되는 것을 바랍니다. 장성한 아들 ‘사우스햄튼’ 백작도 에섹스 백작의 오른팔 역할을 합니다.
쎄실 가문은 에섹스 백작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밉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희곡에 쎄실을 비하하는 내용으로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하지만 치밀하게 짜여진 쎄실의 계획대로 에섹스 백작은 반란의 우두머리로 몰려 처형당합니다. 에드워드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여왕을 찾아가 선처를 부탁합니다. 아들은 풀려나고 엘리자베스 여왕도
죽고 영국은 새 왕을 맞습니다. 벤 존슨은 죽음을 앞둔 에드워드를 만나서 그의 마지막 작품을 전해 받습니다.
참으로 당돌하고 재미있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16세기 영국 왕실과 런던의 묘사가 놀랍도록 세밀합니다. 여왕과 대신들의 의상은 박물관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고풍스럽고 화려합니다. 진흙창 거리,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통,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 회색의 성. 그 시대의 배경이 생명을 가지고 눈 앞에 펼쳐집니다.
유명한 셰익스피어 연극들의 하일라이트를 영화 속 무대에서 감상하는 것은 뜻밖의 즐거움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합니다. 창작에 대한 열정과 귀족 신분 사이에서 고뇌하는 에드워드는 타고난 재능에도 불행합니다. 셰익스피어만 아니었으면 당대 최고의 극작가였을 벤 존슨은 백작의 천재성에 절망하면서도 그의 작품을 끝까지 지켜냅니다. 세속적이고 몰염치한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거짓말 한 번으로 돈과 명성을 얻고 죽어서도 전설이 됩니다. (말도 안됩니다. 물론) ‘아마데우스’를 생각나게 하는 흥미롭고 독창적인 영화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