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세상] 사랑보다 깊은 상처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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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김
<영화칼럼니스트/시카고>

 

밸런타인데이입니다.  사랑 영화 보기에 좋은 날입니다. 사랑의 남루하고 아픈 결말을 알고서도 또 다시 같은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밸런타인데이 아침, 잠에서 깬 ‘조엘’은 왠지 침울한 기분입니다. 여느 때처럼 통근 열차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뉴욕 근교인 ‘몬타우크’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충동적으로 기차를 바꿔 타고 몬타우크의 해변에 도착합니다. 쓸쓸한 겨울 바닷가에 왜 왔는지 자신도 잘 모릅니다. 거기서 오렌지색 스웨터에 머리를 파랗게 물들인 한 여자를 봅니다. 돌아오는 기차 속에서 파란 머리의 여자가 조엘에게 말을 시킵니다. 착하고 소심한 조엘은 왠지 이 여자가 마음에 듭니다. 그녀의 이름은 ‘클레멘타인’.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호감을 보입니다.  다음 날 밤,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데리고 얼음이 언 ‘챨스’강에 갑니다. 얼어붙은 강 위에서 손잡고 걷고 미끄러지고, 나란히 누워 밤하늘을 쳐다보며 웃고 얘기를 나눕니다. 조엘은 진지하게 말합니다.

“나는 이 순간을 기다려 왔어. 지금 이대로 죽어도 좋아.”

처음부터 강하게 끌리는 두 사람은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 사이입니다.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다른 두 사람은 바로 그 때문에 사랑에 빠졌고, 2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사랑하고 싫증내고, 사랑하고 상처를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매력적이었던 서로의 다른 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지겨워지고, 참을 수가 없습니다.  잦은 싸움에 지친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떠납니다.  그리고 괴로운 기억들만 골라서 지워주는 ‘라쿠나’회사의 ‘기억 삭제’ 프로그램을 통해서 조엘을 잊어 버립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조엘은 충격을 받습니다. 절망과 분노로 자신도 똑같은 방법으로 클레멘타인을 잊기로  결심합니다. 라쿠나회사를 찾아간 조엘에게  기억 삭제를 개발한 ‘미어즈웩’ 박사는 친절하게 그 과정을 설명해 줍니다. 먼저 잊고싶은 대상과 관련된 물건들을 모읍니다. 추억이 깃든 일기장, 사진, 그림,인형들을 보면서 그 것에 얽힌 과거를 떠올리고, 그 기억을 토대로 ‘기억 회로’를 만듭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기억 회로’는 컴퓨터에 입력되고, 지원자가 밤에 잠든 사이에 그의 머리 속 회로를 따라 기억 삭제 프로그램을 작동시켜 기억을 지워 나갑니다.

다음 날 잠에서 깨면 회로상의 기억들은 머리 속에서  사라집니다. 고통스런 기억들은 모두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계약대로 조엘의 기억 삭제가 시작됩니다. 회사에서 파견된 두 명의 기술자는 마치 컴퓨터를 수리하듯, 잠든 조엘에게 기억 삭제용 헬멧을 씌우고 한가롭게 농담을 하면서 프로그램을 작동시킵니다. 기억 삭제는 가장 최근의 기억부터 시작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 갑니다.  마지막 이별에서부터 서로 상처주고 싸우던 시절을 거치면서, 점차 사랑하고 행복했던 시간들이 나옵니다.

조엘은 클레멘타인의 기억들이 하나씩 지워지는 것을 보다가 그 녀와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습니다. 사랑의 아픔도 사랑입니다 . 그녀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조엘은 기억 삭제를 멈추려고 합니다. 꿈 속에서 절규합니다.  이 기억들을 내버려 두라고. 그는 잠든 의식을 깨우려고 애쓰면서 삭제 프로그램에 강하게 저항합니다. 조엘의 저항때문에 삭제 과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미어즈웩박사가 출동합니다. 박사가 조엘의 머리 속에서 클레멘타인을 찾아 지우려고 하면 , 조엘은 그녀를 데리고 다른 기억 속으로 도망갑니다. 기억을 지키려고 필사적인 조엘이지만 삭제 프로그램은 전부 마치게 됩니다.

기억을 잃은 두 사람은 알 수없는 강렬한 힘에 이끌려  몬타우크해변에서 재회합니다. 과거에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입니다. 머릿 속 기억은 지워졌는데 심장은 서로를 알아보고

두근거립니다. 나중에 두 사람은 라쿠나회사 직원이 보낸 편지와 녹음 테잎을 받습니다.  사실을 밝힌 편지와 상대방의 기억을  삭제해 달라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사태를 파악합니다.  가슴뛰는 사랑의 출발점에서 이미 끝난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슬픔과 연민으로 돌아서는 클레멘타인을 조엘이 불러 세웁니다. 사랑때문에 실망하고 아파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다시 그녀를 사랑하고 싶으니까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현실과 기억, 의식과 무의식, 꿈과 상상의 세계를 오가며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그처럼 달콤하던 사랑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합니다. 색색으로 물들인 머리와, 자유롭고 도발적인 성격이 사랑스럽던 여자가 저속하고 창피하게 느껴집니다.

수줍고 따뜻하고 다정해서 울타리처럼 느껴지던 남자가 지겹고  답답하고 숨막힙니다. 사랑은 변합니다. 행복하고 평화롭기도 하지만 두려움, 질투, 미움의 감정도 같이 공존합니다.  마냥 좋은 것만이 아닙니다. 고통과 분노와 슬픔도 함께 숨어 있습니다.

기억은 지워져도 사랑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게 남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