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김의 영화 세상] 트럼보(Trumbo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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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kim

조이 김
영화 칼럼니스트

 

1947 년, 헐리우드.  달톤 트럼보는 가장 잘나가는 재능있는 각본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질 때마다 성공하고 비싼 몸값으로 아내 클레오와 세자녀들과 풍족한 삶을 누립니다. 하지만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의회의 ‘반미활동 조사위원회’가 영화계 인사들을 청문회에서 증언하도록 요구합니다. 평소에도 사회의 불평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내던 트럼보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공산당에 가입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 작가 , 감독들과 트럼보는 일방적으로 그들을 반역자로 몰고 가는 청문회에서 묵비권을 행사하고 결국 ‘의회모독죄’로 감옥에 들어갑니다. 이들은 ‘헐리우드 10 ‘이라 불리우며 블랙리스트에 오릅니다. 국익에 반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는 데도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무분별한 여론의 희생 제물이 됩니다. 그 선봉에는 나라를 위해 전쟁에서 싸운 적도 없으면서 애국을 외치는 죤 웨인같은 허울좋은 극우파 배우나 뱀같은 혀로 사람들을 조종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가십 칼럼니스트 헤더 호퍼가 있습니다.

일년의 복역을 마치고 나온 트럼보는 당장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합니다. 아무도 그와 동료 작가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습니다. 트럼보는 B급 영화를 제작하는 ‘킹 브라더스’의 사장 프랭크 킹을 찾아가서 자신의 작품을 싼값에 사줄 것을 제안합니다. 트럼보가 3일 만에 써 온 각본을 보고 감탄한 프랭크는 계속해서 일을 맡깁니다. 트럼보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각본을 씁니다. 식구들도 분업으로 트럼보를 돕습니다. 가명으로 전화선을 여러 개 설치하고 서로 돌아가며 전화를 받고 원고 수정과 배달도 합니다. 일감이 밀리자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줍니다. 원고료가 들어오면서 생활도 안정이 되어 갑니다.  트럼보가 친구 작가 이안 맥켈런 헌터의  이름으로 쓴 각본 ‘로마의 휴일’이 영화로 만들어지고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합니다. ‘로마의 휴일’은1954년 아카데미 최우수각본상을 받게 됩니다. 트로피는 친구 이안이 받았습니다. 텔레비젼으로 시상식을 지켜 본 식구들은 환호합니다. 그래도 트럼보는 여전히 음지에서 글을 써야합니다.

새로운 작품 ‘브레이브 원’을 끝내고 트럼보는 흡족해 합니다. 영화는 성공하고 또 다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합니다. 이번에는 로버트 리치라는 가공의 작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영화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달톤 트럼보가 가명으로 작품을 쓴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돌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배우 커크 더글러스가 트럼보의 집을 찾아옵니다. 자신이 주연, 제작하는 새 영화에 각본을 써달라고 합니다. 로마시대때 반란을 주도하는 노예 이야기입니다. 트럼보는 ‘스파르타쿠스’ 각본을 씁니다.  ‘스파르타쿠스’ 각본을 읽은 헐리우드의 명감독 오토 플레밍거도 자신의 영화 ‘영광의 탈출'( Exodus) 각본을 트럼보에게 정식으로 부탁합니다.  트럼보는 커크 더글러스와 오토 플레밍거에게 영화 크레딧에 자신의 이름을 내달라고 요청합니다. ‘반미활동 조사위원회’와 헤더 호퍼의 협박과 방해에도 플레밍거 감독은 ‘영광의 탈출’이 트럼보 작품임을 언론에 공표합니다.  트럼보의 이름이 들어간  영화 ‘스파르타쿠스’가 완성됩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영화를 보고 크게 힛트할 것이라고 호평합니다. 끈질기고 무자비했던 블랙리스트가 13년 만에 사라지게 됩니다.

2차 대전 후, 냉전이 지속되면서 미국을 휩쓴 공산당잡기 광풍에 희생되었던 작가 달톤 트럼보의 실화입니다. 민주주의의 상징인 미국에서 더구나 온갖 소재와 무한한 상상력으로 영화를 만드는 헐리우드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습니다. 트럼보는 시대의 부당함과 조작된 여론에도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자신은 물론 동료와 가족까지 국가적으로 왕따를 당한 셈입니다.

억울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트럼보는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으로 재기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B급 영화 각본을 쓰면서도 주옥같은 작품으로 아카데미상을 두번이나 받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짜임새 있는 줄거리에 인간미 있고  유머러스한 트럼보가 매력적입니다. 죤 웨인, 에드워드 G 로빈슨, 커크 더글러스 같은 유명 배우들이 등장하고 ‘로마의 휴일’ , ‘ 스파르타쿠스’ 등의 명작들이 탄생하게 된 비화가 흥미롭습니다. 특히 입걸고 의리있는 프랭크역의 존 굿맨과 얄미운 입담으로 트럼보 일당을 박살내는 헤더 호퍼역의 헬렌 미렌, 현명하고 강인한 아내 클레오역의  다이안 레인 등 조연들의 연기가 뛰어납니다.

당시의 영화 스튜디오, 의상, 자동차등 셋트와 소품들도 훌륭합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작가들 중 대부분은 미국을 떠나거나, 이혼당하고 자살하고 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어두운 역사를 통해 재미와 교훈을 주는 수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