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만도 못한 인생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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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 두로와 시돈 지방 가나안인들이 기거하는 땅으로 가셨습니다. 잠시 한적함을 얻으시려고 가신 것이었지만 사실은 그곳에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리는 한 사람을 만나시려고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그곳에 도착하셨을 때 예수님을 애타게 부르는 한 여인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 여인의 신원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여인은 성경의 표현대로 가나안 여자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그 여자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닌 이방인,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경멸과 멸시를 당하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소리치기 시작합니다. “주 다윗의 자손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 나이다”(마 15:22) 자신의 딸이 귀신들렸으니 그것을 좀 고쳐달라고 하는 애원이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다른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대하는 것처럼 그 여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듯이 지나쳐 버리셨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인은 계속 따라오며 소리 치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님 저 이방 여인이 계속 따라 오는데 좀 가라고 좀 하십시요. 시끄러워 못 살겠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도 유대인들 처럼 이방인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내가 어찌 나의 자녀인 유대인들에게서 떡을 취해서 개같은 너희 이방인들에게 주겠느냐” 라고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개들도 주인이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으니 제가 비록 개같은 이방인이지만 그 구원의 은혜를 나누어 달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거칠었습니다. 그 가나안 여인을 개로 빗대어 말씀 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개를 아주 부정한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개들은 쓰레기를 뒤지고 죽은 고기를 먹으며 전염병을 옮기는 동물로 매우 부정한 동물로 생각했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의 시체를 개들이 와서 뜯어 먹게 만드는 사건이 있는 것을 볼 때 유대인들은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데 개는 그 시체를 뜯어 먹는 동물이니 유대인들이 생각하기에 개는 아주 더럽고 부정한 동물 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의 상스러운 표현 속에서 항상 “개”라는 동물이 등장합니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누구나 감정을 상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지금 예수님으로부터 개라고 하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무엇이 이 여인으로 하여금 개 취급을 당하면서까지 예수님께 매어 달리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자기야 무엇이 되었던 상관없이 자신의 딸을 고치려는 어미의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자기의 딸을 살리고자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얻고자 기꺼이 개 취급을 당하면서 까지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던 그 여인의 모습을 보시면서 우리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되리라”(마 15:28)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개가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개를 반려견(伴侶犬)이라고 하여 인생의 동반자, 친구로 까지 생각합니다. 오히려 개가 사람보다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을 정성으로 키웠지만 다 성장하여 부모의 곁을 떠납니다. 밖에 나가서 바람 피우고 골치 아프게 하는 남편보다도, 어떤 친구 보다도 늘 내 곁에서 나를 따르고 내가 사랑을 주면 주는 만큼 나를 좋아해주는 개가 더 낫다는 것입니다. 개 보다 못한 우리 인생들, 성경에서도 죄로 타락한 인생들을 향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셨도다”(사 1:3) 개나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따르는데 인간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탄식합니다(렘 17:9). 개보다 못한 인생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자기의 딸을 살리려고 자신이 개와 같은 존재로 취급 받는 것을 조금도 서운해 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개가 되어도 자기의 사랑하는 딸을 살리겠다고 하는 지극한 모성애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개 만도 못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개보다 못한 죽음을 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그리스도 이십니다. 개 만도 못한 인생들을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를 얻게 되었음에 감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