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인간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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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다. 인간도 선하게 창조했다. 악은 창조하지 않았다. 대신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인간은 그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최초의 시험이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선악과 사건이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셨다. 선악과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이다. 히브리어 “안다”는 동사는 단지 지적으로 안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기준의 문제이다. 선과 악의 기준, 그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우주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그 기준을 정하신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먹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기로 했다. 하나님을 하나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인간이 그 자리에 올라가기로 했다. 그러자 타락이 발생했다. 타락은 한 부분에만 발생하지 않고 영, 육 모든 부분에 다 발생한다. 이것을 가리켜 전적 타락이라고 한다. 전적 타락이라는 것은 죄가 너무 많은 까닭에 완전히 악마가 되어 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전적 타락의 전적이라는 말은 정도를 가리키기보다는 범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서 100% 순수한 물이 들어 있는 유리컵이 있다. 이것은 인류가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에 독이 한 방울 떨어진다. 그러면 순수한 물이 어떻게 될까? 오염된다. 그런데 한 부분, 즉 독이 떨어진 자리만 오염되지 않는다. 독이 퍼진다.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그러자 물 전체가 오염된다. 이것이 전적 타락이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류가 이런 상태에 있다.

전적 타락은 구체적으로 사람의 지정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한다. 먼저 지적인 면에서 타락한다. 전적으로 부패한 사람도 높은 지능이 있어 복잡한 사상 체계를 생각해낼 수 있다. 인간의 지능이 죄 때문에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부패한 인간의 지능은 항상 오류를 범한다. 예를 들어, 진화론을 들 수 있다. 종간 진화, 또는 대진화(Macro Evolutionism)를 뒷받침할만한 화석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모든 진화론자는 인정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야 하기에 진화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신앙이며 종교이다.

인간은 정적인 면에서도 부패한다. 인간의 감정은 창조주에게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 것들에 집착한다. 의지적인 면에서도 부패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쁨으로 복종하지 않는다. 더불어 타락은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가 부패하게 하고 국가가 부패하게 한다.

하지만 더욱 슬픈 일이 있다. 한 방울의 독이 떨어진 범위만 전적 부패로 머물지 않는다. 범위가 오염된 인간은 서서히 질적으로도 그 오염의 정도를 더해간다. 독은 점점 더 증가한다. 그러다가 순수한 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100% 독만 있는 상태가 된다. 이때가 바로 지옥에 간 사람의 상태이다. 지옥에 있는 사람은 선한 면이 단 1%로 없는 100% 악인이 된다. 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은 어떤가? 이 사람도 현재 전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독으로 오염된 컵에 해독제가 한 방울 떨어졌다. 이 해독제는 독을 해독한다. 그러나 해독제가 물에 들어갔다고 해서 곧바로 물이 깨끗해지지는 않는다. 시간이 걸린다. 독은 독대로 컵의 물을 오염하려고 하고, 해독제는 독이 오염한 물을 열심히 정화한다. 이런 갈등의 상태로 살아간다.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죄와 타락과 부패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관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으로 죄를 죽이고, 악을 죽이며, 미움을 죽이고, 타락으로 오염된 자아를 죽인다. 그러다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주님은 우리를 오염되지 않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죽음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깨끗해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