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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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살아계시고 참되신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한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시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은 공간에 대해서 편재해 계신다. 어디에나 다 동시에 계신다.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서 영원한 현재에 계신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살지만, 하나님은 시간 밖에서 사신다. 하나님의 속성을 논할 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공유적 속성, 또 하나는 비공유적 속성이다. 공유적 속성은 하나님과 인간이 같이 소유하는 속성을 뜻한다. 지혜, 지식, 사랑, 인내, 정의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속성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에게서도 발견된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속성 중 일부를 공유한다. 하지만 그 질적인 차이는 분명하다.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는 그 질적인 면에서 다르다. 지식, 사랑, 인내, 정의도 마찬가지이다. 인간 안에도 이런 속성이 있지만, 하나님의 그것과 비교하면 차이는 현저하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 완전한 사랑, 완전한 인내, 완전한 거룩함을 소유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다음으로 비공유적 속성은 오로지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있는 성품이다. 인간에게는 없다. 전능, 전지, 영원, 편재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이 말은 사전적 의미로 정의해서는 안 되고 신학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전능하다는 말을 하나님은 뭐든지 다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당신의 선하고 기뻐하는 뜻을 따라서 무엇이나 행할 수 있는 무제한의 능력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아니 안 하신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네모난 원을 만들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정한 질서와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소멸할 수 없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속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함으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빼앗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이 억지로 하나님을 인식해서 믿게 하지 않는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하나님은 전지하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실 때는 우리 인간처럼 시간에 따라서 순차적으로, 연쇄적으로 알지 않고, 동시적으로, 포괄적인 통찰력으로, 전체적으로 아신다. 인간이 미래의 일을 아는 것을 가리켜 예언이라고 한다. 과거나 현재에 미래를 미리 안다는 뜻이다. 그러한 하나님에게는 예언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미래의 일을 미리 알지 않고, 시간 밖에서 모든 것을 영원한 현재로서 아신다. 하나님의 예정이란 이런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 미래에 발생할 모든 일을 과거에 정해 놓은 것이 예정이 아니다. 이런 이해는 예정이 아니라 운명 또는 숙명이라고 한다. 이슬람의 교리이다. 예정이란 시간 밖에서 발생한 사건을, 인간의 언어를 빌려서 시간 안에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예정은 시간 밖의 문제이다. 마태복음 24:36을 보면 예수님이 세상의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아들은 성자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성자 하나님도 모른다고 했다. 왜냐하면 현재 성자 하나님은 시공간 안에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예정의 문제는 시간 밖의 문제이기 때문에 시·공간 안에서 이해할 수 없다. 시·공간 안에서 사건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융통성 있게 변화한다. 세상은 운명론처럼 기계적으로 어떤 프로그램화 되어서 돌아가지 않는다. 시·공간의 세계에서는 융통성 있게 돌아간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융통성 있게 돌아가는 역사가 시·공간 밖에서는 하나의 그림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오 차원 세계에 있는 어떤 존재가 사차원에 사는 우리 인간을 보는 것과 같다. 또는 시간에 따라 진행되는 한 편의 영화에 나오는 모든 장면을 이차원의 도화지에 그리는 것과도 비슷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