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개혁주의 신앙: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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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트리니티 신학대학원 논문심사위원)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 과거의 여러 철학자가 철학적 사고방식으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려고 애썼다. 주 후 10세기에 살았던 안셀무스는 존재론적 논증을 통해서 하나님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의 논증을 보면 총 세 단계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신은 정의상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더 큰 존재이다. 둘째, 실제로도 존재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보다 크다. 셋째, 따라서 신은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상상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크지 않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우주론적 논증으로 하나님을 증명하려고 했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 또는 우주의 원인을 소급해 올라가면 맨 처음 원인이 되는 원인, 즉 제 일원인이 나오는 데 이 원인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논증했다. 이들 외에도 철학적 범주 내에서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많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성경의 논리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미 자기 자신을 자연, 인간의 양심, 그리고 성경 말씀 속에 계시하셨기 때문에 하나님 존재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타나심으로 살아 계심을 이미 증명을 했는데 무슨 증명이 또 필요하냐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역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고 되묻는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하므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더욱더 논리에 맞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무신론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무조건 존재하지 않은 것일까? 예를 들어,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에게 어느 미술 선생님이 색깔에 관해 설명한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하지만 이 사람에게 이런 설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사람은 색을 전혀 인식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색깔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색이 없는 것일까? 누구에게 문제가 있나? 문제는 맹인에게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는데도 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할까? 성경은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의 죄가 인간의 눈을 어둡게 해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가르친다. 물론 여기에서의 눈이란 육신의 눈이 아닌 인식의 눈이다. 마태복음 5:8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하나님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한다. 죄가 없어야 한다. 거꾸로 말해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러운 죄 때문이다. 죄가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을 어둡게 만들어서 하나님이 분명히 명백히 나타나셨는데도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신약에 보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 보일 수 있도록 나타나셨다.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전능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모든 기적을 다 보여주셨다. 그런데도 당시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임을 부정한다. 그들은 죄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져서 눈앞에 하나님을 두고도 부정했다. 하나님이 또다시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죄악으로 인해 부패한 인간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부인할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 도다” (시 14:1a). 어떤 자가 어리석은가?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시 14:1b). 죄인, 즉 부패하고 가증한 자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 심판할 자가 없어야 그들의 입장에서는 마음이 놓인다. 그런데 사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모두 다 영적 맹인이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서 영적 눈을 뜰 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니까 거듭난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무신론자는 볼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