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다리는 자인가? 기다리게 하는 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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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주님께서 앞으로 40년 안에 다시 오실까요?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지난 2013년 부활절 일요일을 앞두고 실시한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 조사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거의 절반이 예수님께서 “확실히”(27 %) 또는 “아마도”(20 %)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38 %는 그리스도가 앞으로 40 년 안에 확실히 또는 아마 돌아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재림 곧 우리를 다리 데리러 오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 자신이 약속하셨고(요 14:1-3), 하늘의 천사들이 보증했으며(행 1:10), 사도들의 의하여 재차 확인된(살후 4:16-17) 약속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날 그 날을 고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기다리시는 분은 항상 하나님이셨지 우리 인간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재림을 기다리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우리들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린 적은 없습니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 속 비유에서 탕자는 타락한 우리 죄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하나님의 모습니다. 이 이야기속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탕자가 아닙니다. 그는 떠난 자요. 방랑하는 자요.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그가 아버지를 떠난 이후에 그는 한번도 아버지를 그리워 하지도 않았고 아버지를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자기의 인생을 마음껏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 기다리는 자는 아버지입니다. 그는 아들이 떠나간 그 날로부터 하루로 빼 놓지 않고 아들이 떠나버린 먼 길 귀퉁이를 바라보며 아들을 기다립니다. 아들이 다시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의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누가복음 15장 20절의 기록처럼 아들이 돌아오는 모습을 본 아버지는 “아직 상거가 먼데…” 그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알아보고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어찌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아들이 돌아 간다고 미리 전화를 했겠습니까? 편지를 보냈겠습니까? 아니요.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미리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 멀리 마을 입구에 아들의 모습이 나타나자 마자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갑니다. 아니 기다렸습니다.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오려나 항상 깨어서 기다렸습니다. 머리를 들고 기다렸습니다. 자다가도 아들 생각만 나면 일어나서 아들을 기다렸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기를 고대하고, 돌아 오기를 기다렸던 사람은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이것이 탕자의 아버지의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이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정말 여러분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계십니까? 정말 주님을 만나기를 고대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재림을 기다리는 자입니까? 아니면 기다리게 하는 자 입니까? 재림에 대한 기다림의 간절함은 우리보다 주님께서 훨씬 크십니다.  어서 속히 우리를 이 무서운 죄악의 세상에서 건져 올려 하늘로 데려 가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직 그 때가 안 되었기 때문에 우리 주께서는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럼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기다리고 계실까요? 주님은 죄지은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그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 우리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성경은 이 부분은 “스스로 돌이켜”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의미로 한마디로 이제야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회개’를 나타내는 히브리적 사고의 표현이었습니다. 탕자의 길에서, 방랑의 길에서, 죄악의 길에서, 이제야 돌이켜, 곧 회개하여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아버지로 하여금 기다리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며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