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다림을 견디게 하는 힘

1960

 

서상규 목사/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담임

 

“오빠 생각”은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동요입니다. 말 타고 서울 가시면서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온다고 약속한 오빠는 뜸북새와 뻐꾸기가 우는 여름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내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이 되었지만 무심한 오빠는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이 노래는 동요 작가 최순애 선생님께서 그녀의 나이 12세가 되던 해인 1925년에 쓴 글입니다. 가사의 내용이나 최순애 선생님에게 오빠가 있었던 것을 보면 자신의 실화를 노랫말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특별히 일제강점기 시절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할 때 우리들의 부모님 세대는 이 노래에 대한 정서가 남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기다림 속에는 참으로 애잔한 감정이 있습니다.

사실 기다림은 우리의 일상 속에 늘 있는 일입니다. 출근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반가운 친구를 기다리고, 대학에 진학하여 집을 떠난 자녀들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림은 왜 평소보다 더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일각이 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이 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은 아주 짧은 시간이라도 삼 년처럼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의미입니다.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 시간이 느리게 가는 느낌을 줍니다. 분명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일 텐데 우리의 마음에 따라 기다림의 길이가 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시간에는 객관적 시간과 주관적 시간이 있다고 합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합의된 측정 가능한 시간입니다. 측정 가능함은 무게나 거리와 같은 물리 단위와 마찬가지로 측정 단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 시간을 객관적 시간(objective time) 또는 실제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객관적 시간과는 다른 시간을 경험하면서 삽니다. 어떨 때는 시간이 훌쩍 지나는 것처럼 느꼈다가도 또 어떨 때는 지루하도록 시간이 지나가질 않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시간은 객관적 시간과는 달리 길어지거나 짧아집니다. 다시 말하면 상황에 따라 빠르게 흐르거나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마음의 시간을 주관적 시간(subjective time) 또는 심리적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이유를 모르고 무작정 기다릴 때는 그 기다림이 매우 힘들지만 기다림의 이유를 알며 상황은 달라집니다. 그것은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놓고 10분 정도를 기다렸다가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연구자를 불러달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한 그룹에는 기다림에 대한 이유와 실험에 대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고 또 다른 그룹에는 기다림의 실험에 대한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려 주었습니다. 결과는 예상보다 더 뚜렷했는데 왜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는 참가자들은 10분은 커녕 심하게는 5분 남짓 지났을 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충분히 이유를 설명한 그룹은 달랐습니다. 10분쯤 기다렸다고 생각하면 벨을 눌러 연구자를 불러달라는 지시를 해두었는데, 15분 가까이 묵묵히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연구결과를 살펴보면 이유를 설명하며 양해를 구한 조건의 경우가 주관적 시간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마음의 시간은 작은 조건 하나만 있어도 얼마든지 늘었다 줄었다 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약속이 드러나 있습니다(요 14:1-3; 행 1:10; 살전 4:16-17).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을 기다린지도 어~언 2000여년이 되었습니다. 결코 짧지 않은 기다림이었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 까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기다림의 끝에 만날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우리의 기다림은 그렇게 힘들지 만은 않을 것입니다. 기대를 품을 수 없는 기다림은 절망이지만 분명한 약속에 대한 기다림은 소망입니다. 비록 서울 가신 최순애 선생님의 오빠는 돌아오질 못했지만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오실 것입니다. 약속을 깨뜨리신 적이 없으신 그분께서 속히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계 22:20). 우리의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이유와 목적이 있는 기다림입니다. 그 기다림의 이유가 오늘 우리의 기다림을 끝까지 인내하며 견디게 하는 힘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