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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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 노인건강센터 사무장(시카고)

 

아버지는 내가 미국 온지 10년 후인 1975년 3월 27일 72세의 나이로 소천하셨다. “무엇이 그리 대단해서 스무 쪽이나 되는 종이에 아버지 이야기를 쓰느냐?” 누가 묻는다면 “내가 오해했던 아버지가 진실한 주님의 모습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서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십자가는 ‘가족’이었다. 부인으로부터 자식들로부터 볼멘소리를 천번만번 들어야했던, 주일 아침 설교준비를 하고 계시는 아버지를 향해 쏟아낸 어머니의 욕설, 당시의 아버지모습을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말이 떠오르지 않지만, 이마에 핏줄이 보이는 아버지가 “불쌍하다!”고 느꼈다. 이외에는 다른 말이 없다. 어머니가 원하신 대로 장로와 집사들 잘 주물러서 자기편 만드는 교회정치를 하고, 썩지도 않고 도둑도 들지 않는 하나님의 창고에 재물을 맡기라는 식으로 헌금을 독려하셨다면 어머니로부터 푸대접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교회 그리고 목회자들의 교회운영은 비즈니스(Business)다. 교회건물이 얼마나 크고 현대적이며, 교인 수는 얼마나 되고, 매주 나오는 헌금액수는 얼마나 되는지 여부에 따라 성공했다 실패했다는 따위의 점수가 매겨지는 현대판 교회에 비하면 나의 아버지 때의 목회는 순수했고 진짜였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 즉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시 84) 이 신앙에 목을 매고 평생을 사신 아버지를 잣대 삼아 점수를 매긴다면 60점 이하 낙제할 사람들이 많다. 그중의 제1호가 바로 나 자신이다. 내 멱살을 잡아당기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고래 등 같은 적산 가옥을 거저 주겠다는 일본 선생의 선심을 거절하고, 설거지 뜨물 세례를 받고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등등 나는 못한다. 못하면서 하는 척은 더더욱 못한다. 당시의 목회자들의 중심은 헌신과 희생이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길이라면 죽음을 각오하고 천 리도, 만 리도 갔다. 가는 길이 험하고 배가 고파도 갔다. 지금은 안 간다. 이것이 옛날과 다른 기업주의적인 면모다.

“돈으로 무장한 물질주의는 불교 조계종에만 국한된 고질병이 아니다…..개신교와 카톨릭 등에서도 교회를 갉아먹는 종양의 역할을 강력하게 해내고 있다. 목사, 신부, 승려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돈에 굴복하고 돈에 끌려 다니는 형편이다” 앞을 내다보는 종교지도자들은 말한다. 예일대학과 하바드 대학에서 高等敎育을 받은 현각스님도 이런 그릇된 모습에 개탄하면서 25년동안 몸담아온 조계종을 떠나겠다고 선언했다. 복음을 위해 배고픔도 참아 내는 종교지도자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나의 아버지는 복음을 위해 가난을 기꺼이 껴안은 분이시다. 이 결정으로 인해 아버지는 저주와 불평불만 그리고 십자가를 등에 짊어지고 사신 분이시기에 아버지와 함께 살아오신 예수님을 외면할 수 없다. 마음이 괴로 우실 때면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주 예수 앞에 아뢰이면….”을 부르셨다. 많은 교인들이 애송하는 찬송이지만 아버지가 부르실 때는 가슴이 아프다. 현각스님과 하태수 목사님이 서로 만난다면 상통하는 점이 많으리라 생각이 든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돈에 대한 얘기는 없을 것이다. 돈에 더러워진 카토릭 교회를 세탁한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 신부였다. 여기서 새로 태어난 것이 개신교인데 이 개신교를 세탁해야할 때가 도래했다. 누가 세탁할 것인가? 옷을 세탁하는 곳은 수 없이 많은데 ‘교회 세탁소’는 없다. 돈과 정치로 얼룩진 교회를 말끔히 씻어줄 세탁소가 필요하다. 세탁소 주인이신 예수님을 잘 보좌할 수 있는 분이 <나의 아버지>라고 생각이 든다. 교회정치로서? 아니다! 복음을 위해 모든 어려움을 삭히시고 만난을 견디시며 조용히 사신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고린도 전서 13장 ‘사랑’의 말씀대로 살다 가신 분을 들라면 나의 아버지를 첫 번으로 들고 싶다. 오래 참고, 온유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이익을 求치 아니하신 분! 살아 돌아 오셨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