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아버지 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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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관(시카고노인건강센터 사무장)

 

조국 해방과 더불어 사회는 무질서해지고 국민들의 생활은 어려워졌다. 야미시장(몰래 물건을 파고 사는 상거래)의 물건 값은 정말 비쌌다. 서민들은 말(馬) 사료로 쓰던 ‘콩깻묵을’ 먹었고 후에는(미군이 진주하고)미군들의 식량인 ration box, drops( 다양한 색깔의 눈깔사탕), 빵, 쏘쎄지 미군식료품과 옷 등 여러 가지가 양키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이 즈음 Shoeshine Boy의 시대가 등장했는데 영어단어 서너 개로 미군과 의사소통 하는 Shoeshine boy들의 용기는 정말 대단했다.

당시 일본사람들은 박해가 두려워 대부분 일본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일본이 판치던 때 그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바이지만, 고래 등같이 큰 집을 그냥 버리고 가는 그들의 허전함은 대단했다. 아버지는 이들을 보고 “회개하고 예수 믿는 백성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간구하셨다. 이 즈음 시골로 피란(소가이(疏開-안전지역으로 옮김)갔던 교인들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혼자 예배당을 지키고 계셨던 아버지는 교인들이 돌아온다는 朗報에 잠을 못 이루셨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남대문 앞길에서 장인(필자의 외조부 金,相濬 목사님-대한 성결교회 창시자)과 교분이 있었던 개성공립 보통학교의 일본인 교장을 만났다. “당신 남편이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요? 그가 물었다. ”제 남편은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고 하자, 그는 반갑다는 듯이 ”조선이 해방되었으니 우리는 사흘 안으로 일본으로 돌아갑니다. 오늘이라도 당신 남편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만나본 후 우리 집을 당신 부부에게 드리겠습니다. 오늘, 내일 안으로 꼭 연락을 부탁드립니다.“면서 집으로 안내했다. 안내를 받아 들어가 본 그 집은 정말 없는 것이 없는 큰 집이었다. 으리으리한 가재도구, 조개탄, 널찍한 다다미 방, 천정에 달린 선풍기 등등 꿈에서나 볼 집이였다. 어머니는 이 갑작스런 제안에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는 가부다!!” 흥분에 사로잡혔다.

어머니는 自初至終을 얘기하시고 오늘 내일 중 그 일본 교장선생님에게 답을 주어야한다며, 그 집에 대하여 소감을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결혼 후 집도 없이 남의 집, 아니면 官舍에서 살아오셨기 때문에 평생소원이 ‘내 집 마련’ 그리고 ‘밥’이였다. 그러나 현실은 이 꿈에서 너무나 동떨어졌다. 세브란스 병원 종교과에 나가 일하고, 퇴근 후 동대문에서 기동차로 능곡까지 가 식량을 구해오고, 교회 사모로서 일하면서 자식 셋을 키워야하고 一人四役을 해야되는 고달픔 女人이었다. 어머니는 그 일본교장선생님의 제안이야말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계시는군!!” 느끼셨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기도를 했는데…………….” 아버지는 더 잇지 않으시고 밖을 내다 보셨다. 어머니가 제일 기다리는 답(Yes냐, No냐)은 안하시고  “기도를 했는대…..”

어머니를 더 자극했다. “하겠소, 안하겠소?” tone이 커졌다. “지금 양떼들이 돌아오고 있는데 어찌 목자가 양떼와 주의 殿을 버리고 갈 수 있겠소? 주의 종으로서 그리 할 수는 없소!”

어머니는 앉은 체로 쓰러지셨다. 꿈이 박살이 나는 순간, 심한 허탈감 때문이다. 다음날,

어머니는 큰 아들(在昌)을 대리고 그 집을 찾았다. 일본 교장선생님에게 못 오겠다는 말을 전하고 돌아오려는데 그 교장 선생님은 “당신 남편은 정말 훌륭한 목사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의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하면서 배웅까지 해 주었다. ‘그 적산가옥과 하나님’, 적산가옥을 소유하면서 사역을 하면 죄가 되는가? “그렇지 않다!” 어머님의 생각이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어머니는 종종 싸우셨다. 현실과 신념의 갈등은 너무나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