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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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 은퇴목사

몇년 전 니카라과에 단기 선교를 간 때 한 여인은 아이가 여섯인데 각각이 아버지가 다르고 그들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몰랐다. 스페인 정복시절 군인들이 지나가며 아이를 낳게 하던 풍습이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아빠는 없어도 엄마의 사랑으로 밝게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 이 땅에 태어나 살고 있다면 누구나 엄마의 태와 가슴, 사랑을 받지 않은 자 있겠나?

어머니는 내게 특별하다. 그는 일본이 한국 합방 당시 경주 외곽 시골 가난한 선비집 9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나 딸이라는 것 때문에 아버지가 하는 서당 뒷글도 줍지 못하고 물 길러 오며 여러 힘든 일로 하대를 받았다. 16세에 홀어머니의 맏 아들과 결혼, 꿈을 안고 찾은 보금자리는 비가 새는 낡은 집, 신랑은 새댁을 모친과 함께 남기고 돈 벌겠다 일본으로 가버린다. 홀로 무서운 시모를 모시고 남의 배를 짜며 품을 팔아 생활하나 시모에게 글을 배웠다. 일본 간 남편은 밤낮 일을 해도 돈을 모으지 못하고 가족 있는 내 나라에서 그렇게 죽으리라 일을 한다면 잘 살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일년 만에 돌아오다. 농협의 돈을 빌려 땅을 사고 부부가 함께 개간하여 논밭을 일구어 생산하고 빚을 갚고 다시 빌려 또 땅을 사고 일구는 일을 계속하며 자식 낳고 살 집을 옮겨 짓고 자수성가, 빌리다가 이제는 빌려주고 베푸는 넉넉한 삶을 누리게 되다. 내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부지런히 일을 하고 기회만 되면 어머니는 누군가 어려운 자를 위해 무엇인가 치마 자락에 숨겨 나가곤 했다.

내 할머니가 지역 첫 그리스도인이 되어 한 시간 거리의 교회에 어린 나를 데리고 눈비 내리고 바람부는 날도 다니는 것을 말리지 못하자 아버님이 땅을 내어 예배당을 짓고 교역자를 청빙함으로 우리 집은 주를 믿는 첫 가정이 되고 어머니는 열심히 예수 믿으며 봉사하였다. 시골 교회지만 부모님이 땅과 소득의 십일조를 봉헌함으로 외부 후원 없이 자립하게 되고 여러 교역자가 있었지만 부모님은 원망 불평 없이 최선을 다하여 섬기는 삶을 어린 나에게 보이셨다. 내가 대학 시절 4년간 전쟁 후 가난 속에 배우려는 아이들을 교회 지하실 야학에서 가르치며 내 스스로를 챙기지 못해서인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 죽을 병으로 피를 토하며 군에 입대도 교사 발령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를 고쳐주겠다며 요양 병원에 장기 입원시키는 그 사랑과 열성이 내게 삶의 의욕을 주고 하나님 말씀과 의료 혜택으로 죽음에서 살아나 지금까지 있음이 감사한 것 뿐이다. 어머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고 도미 유학 중 그는 척추암 진단을 받고 하반신 마비, 심한 통증 속에 동생이 모시며 각방 치료에 최선을 했으나 회복의 길이 없다는 의사의 판정이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기도하며 내가 돌아가 좋은 의사 만나 수술 받고 2년만에 다시 걷게 되자 네가 내 은공 다 갚았다 하시며 25년을 더 사셨다. 아버님 돌아가신 후 마지막 6년 미국에서 어머니를 모시는 동안 며느리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오직 성경 읽고 기도하며 몸에 아픈 곳이 없다며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고 살다가 자는 듯이 죽고 싶다 기도하시던 대로 그의 삶을 마치셨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꾸중이나 채찍을 맞은 기억이 없다.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나를 받아주고 품어주는 넓은 가슴, 항상 격려하고 베푸는 그의 마음이었다. 그의 지혜 정직 근면 사랑 용납 충성을 내 가슴과 삶에 심어주시어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어느 어머니나 그러 하겠지만 내게는 오늘의 나를 틀잡아 주신 어머니가 계신 것이 복이요 은총이라 그를 어머니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지금 천국에 계신 어머님께 감사와 치하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