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남은40일의 위기(危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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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목사(선한 이웃교회 담임/미 육군 군목)

 

“이 나라의 운명은 40일 뿐이오!” 이같은 외침은 요나가 니느웨성 한 복판을 걸닐며 소리친 메세지였습니다. 지금도 이라크에서 두번째로 큰 도시인 모술은 성경에 등장하는 니느웨가 위치한 장소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시의 크기가 사흘길을 걸어야 할 정도로 큰 곳이 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이 번영하는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성에서 목놓아 외친 요나의 이같은 말에 누가 감히 씨가 먹힐 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 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선지자 자신조차 원치않았던 기적이 그 땅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앞에 베옷을 입고 회개하고, 왕과 관리들은 머리에 재을 뿌리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짐승조차 베옷을 입고, 금식하였다고 합니다 (요나 3장). 추운 겨울날 종종 개에게 두꺼운 옷을 입혀 산책을 시키는 것은 보아왔지만, 베옷을 입은 개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40일 밖에 남지않은 이 절대 절명의 위기앞에서,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보인 위기위식과 회개운동은 제국의 운명을 새롭게 선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BC 8세기 중반에 외친 요나 선지자의 선포에 응답한 앗수르는 BC 612년에 바벨로니아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100여년 이상 연장된 제국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입니다. 40일간의 위기앞에 보인 니느웨성의 회개운동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들은 멸망의 위기에서 온백성이 도덕적 그리고 영적갱신과 부흥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위기(危機)라는 한자어는 두글자의 흥미로운 조합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위험’과 ‘기회’라는 말이 한 단어에 내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위기란 곧, 위험상황에서 찾아올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있어왔던 어떤 제국보다도 강대한 미국이 최근들어 나라안밖의 일로 위기위식이 깊어지는 것을 보게됩니다. 지난 주 하와이에선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하와이 섬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잘못된 공습경보를 실제상황인양 내보낸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두 자녀를 학교에 보낸 어떤 부모는 이같은 촌각을 다투는 임박한 위험앞에서 어떤 자녀를 먼저 픽업해야 할 지 공포와 혼란에 빠졌다고도 합니다. 조국땅 한반도의 위기는 또한 세계의 관심에 중심에 있습니다. 스포츠를 통해 세계의 평화와 친선을 도모하는 동계 올림픽이 다음달 8일부터 평창에서 개최됩니다. 이번 올림픽엔 북한과의 단일팀을 구성해 경기에 출전함으로 스포츠를 통해서 한반도의 군사적, 정치적 긴장과 대결 관계를 협력과 화해의 관계로 만든다고하는 장미빛 전망도 내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평화의 행사에도 우린 무언가 떨쳐버릴 수 없는 위기의 검은 그림자가 한반도에 깊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특별히 예술단과 선수단을 남한에 보내면서도, 한쪽으론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완성을 세계에 알리며 북한 체제를 선전하는 그들의 양면성을 바라 볼 때, 올림픽을 핑게삼아 검은 속마음을 감춘 거짓 평화에 오히려 우리를 더욱 불안하게 만듭니다. 얼마전 미CIA의 보고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간이 오직 3개월뿐이라는 타임라인을 제시했습니다. 마치 “나라의 운명이 40일 뿐이오!” 외친 요나의 음성같아서, 불현듯 한반도가 가진 타임라인도 이와같은 것은 아닐까 몹시 불안해 집니다. 만약 40일의 위기가 우리앞에 놓여졌다면,  과연 너나 할 것 없이 머리에 재를 뒤집어 쓴 체,  빵바닥에 주저앉아 “내탓이요!”를 외칠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요? 그같이 책임지고 회개할 우리의 지도자들은 몇명이나 될까요?   몸에 베옷을 걸지기는 커녕, 여전히 사치스런 주얼리와 의복을 걸치고 나라와 이웃의 운명엔 콧방귀도 뀌지않을 지독한 이기주의의 삶의 태도를 우리는 과연 부끄러워 할까요?  “위기(危機)는 기회일 수도 있다”는 오래된 지혜가 여전히 내 민족의 귀엔 전혀 들려지지 않는 그저 허무한 교훈이 된진 않을까요?  위기를 당한 조국을 위해 쉼없는 기도가 필요한 때라 여겨집니다.(Servant.sa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