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다 이루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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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無礙) 공진성

 

다 이루었다 라고(1)

사람마다 지난날을 그리워하고 소중히 여긴다. 최선을 다한 치열한 삶일수록 더욱 그러할 것이다. 최고 상류의 유명 인사의 삶이든 무명의 하류 인생을 고달프게 살았던 저마다 고운 정 미운 정은 쌓이고 자랑할 것이 없어도 생명의 귀중함은 동일하고 공평하다. 그래서 늙고 병약하여 지면 누구나 건강하고 활기에 넘치던 젊은 시절이 그리운 법이다.

두려움을 모르고 사전에 불가능이 없던 패기, 강인한 의지, 황홀한 꿈과 풍부한 상상력, 신념에 불타던 열정, 지치지 않는 체력과 빠른 회복력, 지고한 이상을 향한 각고의 노력, 경쟁에 뒤질세라 절차탁마 하며 이에 전심전력함으로 목숨까지 돌보지 않고 가벼이 여겨 기어이 깊은 샘에서 나오는 맑은 정신력은 정의를 위하여 싸울 수 있었다.

유약하고 안일함을 뿌리치는 용기와 모험심은 청춘만의 특권인가? 그 풍성하고 다정다감한 유머와 위트, 측은지심의 인정도 참 많았지,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 백절불굴의 근성은 조국사랑과 충성심으로 이어졌다. 그 숱한 고난과 역경에서 비관하거나 실망치 않았다. 언제나 자신감과 낙천적이며 낙관함으로 변변치 못한 부끄러운 처지일망정 숨기고 감추고 싶지 않은 솔직함과 자긍심은 살아 오히려 내 못난 점을 자랑스러워 하고 또 한껏 인생의 신비감이 막연해 방황하고 알 수 없는 무명과 모순과 혼동 속에 이룬 것도 내세울 만한 것도 없지만 희억 상념은 새록새록 그립게 한다.

이제 뒤돌아보며 죽음 앞에 병약한 자신과 친구 지인들의 주변을 둘러본다. 희비고뇌와 병 로사의 두려움을 느끼는가? 준비 없고 정제되지 않은 사유에서 오는 실망과 좌절인가, 후회와 원망인가, 스스로 외로워하고 이유 없는 분노는 쇠약함을 탓하는가? 노쇠하여 시력과 청력마저 어두워지는 노인성 질병에 시달리는 것을 볼 때 동병상련의 연민의 정은 이 글을 쓰게 한다. 무엇으로 어떻게 하면 조금이나마 위로와 용기와 도움말을 줄 수 있을까? 또 노인은 마음이 황폐하고 황량하여 멍하게 보일 때가 있다.

몇 개월 전 나도 요양원에 입원하였는데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유명을 달리한 친구 이야기다. 상태가 좋지 않은 친구를 위해기도 했으나 전여 재활의 가망이 없는 친구를 위해기도 밖에는 어떠한 다른 방도는 없었다. 생명이 점점 잠식당하고 기력이 다 했을 때 우리는 담대하거나 순응 하거나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의욕을 포기한 시점에서 소생과 회복을 장담하거나 자신할 자 누가 있으랴 실낱같은 기적을 바라며 나는 고심하고 자문자답 한다. 곱게 우아하게 노익장으로 늙어서 죽음 앞에 당당하며 천리에 기쁨으로 내세를 맞으며 내 진정 사랑하였던 이들의 복락과 평안을 빌며 자신도 평안히 이승을 하직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유심히 낙화를 본다. 인생의 마지막과 무엇이 다르랴?

 

다 이루었다”라고(2)

무애(無礙) 공진성

 

봄이 오면 피고 지는 꽃, 낙화의 아름다움 그로 인해 열매 맺고 씨앗이 영글고 자자손손 대대로 이어가는 순환의 조화인데 낙화의 모습이 깨끗하고 예쁜 놈,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놈, 색깔까지 누렇게 변하여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놈 등등 오랫동안 한 잎 한 잎 곱게 아물어 떨어지는 무궁화 등등 가지 각 색으로 시 사 하는 바가 크다.

애처롭고 슬픈 감상의 눈으로 인생을 돌아보면 노쇠하여 분별력과 이성을 잃고 무엇에든 짜증과 성질이 나고 더욱 이기적, 지배적, 권위적인 집착이 대단히 유별난 노인을 볼 때 노망이야 어쩔 수 없다 하고 뇌혈관성 질병에 안타까움이야말로 다할 수 없지, 여기에 인성마저 변하여 평소 겸허한 인품은 사라지고 자고하고 독재적이며 자기만 위해 달라는, 옹고집 노인을 위해 그래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가족들과 진심 어린 간호를 옆에서 보아도 고맙고 아름답다. 늙고 병드는 것이 어찌 저주이랴! 지극히 자연스럽고 순리이다.

그러나 우리는 병의 원인을 제공하지 말자, 병과 친구 되어 다독이면 병도 스스로 떠나는 기적 같은 축복도 있다. 우주 삼라만상이 신선하고 신령함에 경탄하면서 우리의 관계를 재발견하고 이것이 있기에 저것도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연계되어 일어나는 밤과 낮 음양의 이치 등 모든 필연의 진리 앞에 희비 고뇌는 교훈이 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되는 최악의 고통 가운데 사랑과 설렘과 경이롭고 내밀한 감동을 발견한다면 역설 같으나 행복자이다. 호흡이 있는 한 환희를 얻자.

젊은 날의 그 생동력과 활기는 없을 지라도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여 살기를 열망하자. 아니 목숨을 버려 목숨을 얻든 무한한 사랑을 간직하고 순수하고 순결한 아름다움 속에 신비롭고 신령한 은총을 체험하고 찬양하자. 소망 중에 희생과 헌신에서 오는 참된 희열을 맛보자.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인생을 추구하고 성장하는 심신과 건강한 힘이 아직 남아 있다면 남을 위해 아낌없이 주고 가자, 나로 인해 남이 기뻐하고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작은 재능이 있다면 감사하고 한없이 기뻐하며 나누어 주자.

신이 어떻게 복과 생명을 주는지 배워 알자. 기도의 힘, 명상, 참선, 선종, 영혼의 세계에서 오는 힘 그것이 가장 의미 있고 참되고 소중한 가치임을 알자. 나의 건강 생명도 여기에서 오며 이것을 상실할 때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보화를 소중히 간직하자. 유한한 일생에 영원하고 무한한 복되게 축원하자. 오늘 살아 잘되고 행복한 비결도 여기에 있고 이로서 죽음은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관문이요 출발점이다. 이런 말이 있지 “내가 태어날 때 나는 울고, 주변 사람은 웃었다. 내가 죽을 때 주변 사람은 울고 나는 웃을 것이다.” 혹자는 인생은 헛되고 덧없고 무상타 하나 그렇지 않다. 이를 극복하면 최종의 개선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깨닫고 도달하는 저 광명한 나라 하늘나라가 있음을 알자.

내 영혼에 평안이 찾아와 안식할 때 열방의 평화와 후손의 복락을 빌면서 이승을 하직하면 더없이 행복이요 더 이상 무슨 기릴 만 한 것이 있으랴 나는 말 하련다, 눈을 감으면서 “다 이루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