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더 신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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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베뢰와의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 유대인들보다 더 신사적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신사적이라는 말의 뜻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울이 전한 말씀을 받고, 또한 받은 말씀이 진짜 그런지를 확인하기 위해 매일 성경을 연구한 태도라고 풀어줍니다. 신앙에서 하나님 말씀은 절대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복음의 메시지로 가득한 이 때에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많고, 매주일 말씀이 선포되지만 영적 성장이 미미한 성도들도 많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뢰아 사람들의 신사적 태도는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번째 태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겁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편견 없이 호의를 보이는 태도라는 뜻입니다. 편견을 극복한다는 건 용기있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었습니다. 사실 니고데모는 주님에 대해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리더급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철저하게 지켰는데, 예수님은 그 틀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기회만 되면 당신을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셨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런 주님의 주장을 신성모독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질타하셨습니다. 그러니 니고데모도 예수님에 대한 편견이 제법 뿌리가 깊었을 겁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간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들을 보고 자신이 갖고 있었던 편견을 과감하게 깨버린 겁니다. 그는 사회적 신분 차이라는 편견도 뛰어넘었습니다. 니고데모는 훌륭한 랍비 밑에서 수학한 자타 공인의 지식인이었고, 반면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습니다. 용기있게 편견을 넘어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에 간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였고, 그 결과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생각과 세계관을 다 내려놓고 말씀을 대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번째 태도는 성경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태도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덮어놓고 믿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진리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매일 구약 성경을 연구한 겁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덮어놓고 믿는다는 말에는 영적 함정이 있습니다. 자기 최면, 자기 세뇌의 뜻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최면과 자기 세뇌는 자기 노력의 결과 입니다.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듯이,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과정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보니 예수님께서 직접 모범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음을 들은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그들이 소망하던 하나님 나라 운동도 다 끝났다고 판단한 겁니다. 이때 주님께서 등장하십니다. 두 사람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요? “얘들아 나다.”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몸을 만져보게 하는 겁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두 제자들과 동행하시는 동안, 주님과 관련된 구약의 말씀을 하나하나 들려주고 풀어주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의 마음은 신비한 영적 체험으로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같은 믿음이 자리잡은 겁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을 통해 선물로 받은 믿음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렸습니다. 주님의 일군이 된 겁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 말씀 묵상과 체계적인 공부에 들이는 시간 투자는 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