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도전은 아름답다

867

김무웅(자유기고가/글렌뷰)

마음이 결핍한 사람들의 특성은 순간적인 충동심과 무모한 도전 의식이 강하다고 심리학자들은 표현을 한다.  또한 평범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충동적인 도전은 잘 안 한다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자고로 인간들은 순간적으로 어떠한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나보다.  마음속에서 이 욕구를 자극 해서 무언가 일을 저지른다. 다른 말로 하면 원시적 반응이 아닐까  한다.  동기도 없고, 의미도 없는 충동을 참으로 많이들 한다. 이러한 충동을 잘 이용하는 것이 종교이다. 때로는 종교는 노력 없이 무언가를 얻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심어 준다. 미래에 닥쳐 올  불행이나 잘못됨을 신(God)에게 책임을 전가 한다. 이런 것은 철저히 비 이성적인 행동이다. 개인의 인생에 찾아 오는 불행은 과학적인 영역도 아니며, 신의 영역은 더구나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에게 의지 하려는 것은 인간의 수동적인 자세를 보여주는 나약한 존재임을 들어 내는 것이다.  뭔가를 의지하려는 마음자세 때문에 많은 종교가 부작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종교가  갖고 있는 진리는 절대로 변화되는게 아니다.  진리는 진리로서 늘 한 자리에 정좌해 있는 것이다.  다만 이를 악용하는 나쁜 인간들만이 존재를 한다. 이 인간들이 진리를 자기 입맛에 맞게 변화를 시킨다. 겉으로 봐서는 가장 올바른 것 같으나 속이 전혀 다른 인간들이 활개를 치는 부조리가  종교 집단 속에서 나타난다. 또한  종교중에 일부분은 노력하지 않는 개인의 게으름에서 출발을 한다.  종교가 없었다면, 능동적으로 살았을지 모르나, 모든걸 신의 영역으로 돌리는 것은 무지한 인간들의 심성이라고 본다.  모든 인간에게 때때로 찾아 오는 행운이나 불행은 과학적인 카테고리( Category ) 속에 속한 것도 아니고, 더 나아가서 종교적인 영역도 아니다. 자연 발생적인 결과물이다.  오늘날 우리가 듣고 보는 수 많은 종교속의 부작용을 보면 모든걸 알 수가 있다. 인간 자신이 스스로를 개척해 나가야 할 일들을 종교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단체가 있다. 단체의 이름은 “ 사이비종교집단 피해가족들의 모임 “ 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로 인한 피해를 당하고 있으면 이런 단체가 생겨 났을까. 가정이 파탄이 나고, 사회적, 국가적으로도 물의를 빚고 있다.
아주 정상적인 어느 목사가 시간이 지나면서 부를 축적하여 산속에 좋은 건물을 지었다. 이 목사는 영성수련원이란 걸 만들었다. 돈을 받으면서 수련회를 한다. 그런데 개신교 수련회인데 절을 한다. 그 절하는 모습이 불교에서 절하는 모습과 똑 같다.  엎드려 절을 한 후 손바닥은 하늘로 향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존경하는 의미라고 한다.  과연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맞는 행동일까 ?   더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 목사들이 자기 교회 신자들을 영성훈련을 받으라고 그리 보낸다는 것이다. 이런 행위 뒤에는 항상 검은 거래가 존재를 한다. 과연 이러한 것들이 성경적인 것이냐 이다. 이런 행위를 스스럼 없이 행하는 자들도 나쁘지만, 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노년에 가장 하기 좋은 것은 명상이다. 뒤 늦게 신선이 되듯이 명상에 도전을 해 보는 것이 노년에 보기 좋은 아름다움 일 것이다. “ 겸손과 의지와 희망 ” 을 가슴에 품고,  도전을 한다면 나름의 풍족한 삶을 누릴거라 생각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