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렘브란트의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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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한마음재림교회 서상규 목사

1606년 7월 15일에 대학도시 레이덴에서 태어난 화가 렘브람트, 그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적부터 그림에 재주를 보여 당대 유명한 화가인 페떼르 라스트만으로 부터 사사를 받았고 20세 이전에 친구와 함께 개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세계 상업의 중심지로 부각되기 시작한 암스텔담에 1631년에 이주하여 본격적인 화가로서 성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그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첫 아내였던 사스키아와 사이에 두었던 네 명의 자녀 중 세명을 잃는 불행을 겪게 되었고 둘째 아내 헤르트헤는 12년 동안 정신병원에 감금되었습니다. 그 후 헨드리키라는 여성과 동거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녀도 마저도 먼저 죽음에 이르고 그의 아들 티투스 마저 죽게되자 그의 개인적 파산과 함께 인생의 나락으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재산, 명예, 권력을 잃고 그리고 가족마저 다 사망한 이후 그의 삶에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던 시절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는 작품을 그리게 됩니다. 물론 이 작품은 성경에 기록된 탕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불행한 인생과 중첩되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그림으로 그려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유작이 되고 맙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눅 15:22-23)

탕자의 이야기 속 아버지는 집 나갔던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자 다음과 같이 네 가지 행동을 합니다. 첫번째로 탕자에게 새 옷을 입혀 줍니다. 이것은 탕자의 신분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집으로 돌아온 아들의 모습은 탕자요 거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거지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이는 스가랴 3장에 기록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슥 3:4-7).

두번째 탕자의 손에 반지를 끼웁니다. 반지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결혼반지의 의미처럼 결속과 하나됨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 행동은 이제 아버지와 작은 아들은 하나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는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음으로 영원히 그의 아들이 되었음(요 1:12)을 증표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번째로 탕자의 발에 새 신을 신기게 합니다. 새로운 신을 신는다는 것은 과거의 삶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과거 어둠에서의 삶의 아니라 주 안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엡 5:8)

네번째,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소를 잡는다는 것은 희생제사를 의미합니다. 탕자로 살아온 작은 아들의 지난 과거의 모든 죄를 송아지에게 전가하고 그것을 잡을 때 그의 모든 죄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라하고 볼품없이 파산한 화가 렘브란트,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는 작품을 그리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왜 그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탕자의 이야기를 그렸을까요? 그의 덧없던 짧은 인생의 시간들을 돌아보며 그가 마지막으로 갖고 싶었던 마지막 소망은 탕자의 아버지가 보여주었던 완전한 용서와 새로운 삶에 대한 약속이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