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말랑말랑, 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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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설교를 못해도 괜찮았다. 본문 해석이 엉망이어도 그러려니 했다. 새벽설교를 두 시간 넘겨도 참을 수 있었다. 고개가 뒤로 넘어가도록 졸려도 그 지루한 내용 전개를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막말은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내용이 은혜로워도 반말과 욕설이 들어간 설교는 견딜 수 없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능력 충만하다는 부흥강사들의 집회에 발을 끊게 된 이유였다. 고귀한 믿음이 천박한 언어에 담길 리 만무했다.

하이데거가 말했듯,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단순한 의사소통의 도구, 그 이상이다. 존재가 세계와 만나고 머무는 곳이다. 우리 이민자에게 영어는 단순한 타국어가 아니다. 다른 존재에 끼어 사는 셋방살이 경험이다. 말이 존재를 드러낸다면, 오늘날 교회의 언어는 무엇을 드러낼까?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했는데, 우리의 언어는 그분의 성품과 인격을 맑게 담아내고 있을까? 상투적이고 판에 박힌 우리의 종교 언어는 무미건조하고 텅 빈 우리 신앙을 드러내는 건 아닐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의 질서가 깨어지던 날, 거기 사람을 유혹하던 거짓말이 있었고 곧이어 남 탓 하던 비난의 말이 있었다. 인류의 범죄와 함께 가장 먼저 타락한 것은 사람의 말이었다. 인간의 타락은 곧 말의 타락인 것이다. 따라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려면 그의 말을 보면 된다.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보려면 그 교회의 언어를 보면 된다. 살리는 말인가, 죽이는 말인가. 소통의 언어인가, 불통의 언어인가. 삶으로 증명하는 참말인가, 삶과 무관한 거짓말인가.

불쌍한 말이 제 집을 잃어버렸다. 남발하여 혹사당한 은혜라는 말이, 사랑이란 말이, 죄와 용서란 말이 주소를 잃고 헤맨다. 말이 진실을 잃으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리 없다. 믿게 만들려면 성을 갈던지, 손가락에 장쯤은 지져야 한다. ‘기도할게요’라는 말은 ‘언제 밥 한 번 먹죠’라는 말만큼이나 가벼워졌다. 말끝마다 ‘영적’ 운운하는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실체가 없는 말이다. 그야말로 제 값을 잃은 말이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 반대일 수 없다. 쏟아내는 말과 글은 내 존재의 증거물들이다. 속에 진실이 없으니 그 말이 진실할 수 없다. 텅 빈 속으로 꽉 찬 말을 할 수 없다. 오늘날 교회의 빈 언어는 교회의 텅 빈 속내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말들이 집을 잃고 헤매다 보니 독해졌나 보다. 딱딱하고 뾰족해졌다. 찌르고 상처를 준다. 교회에서 말로 상처받아 떠난 사람을 합하면 대형교회 몇 개는 나오지 않을까? 신기한 건, 상처 받았다는 사람은 많아도 상처 주었다는 사람은 없는 것. 세상 모든 것들이 다 딱딱해지는 것을 슬퍼한 시인 함민복은 <뻘>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

교회가 좀 말랑말랑해졌으면 좋겠다. 딱딱한 조직과 건물이 교회일 수 없다. 딱딱한 말이 교회의 언어일 수 없다. 말씀이 말랑말랑한 살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 말랑말랑 말의 힘이 우리 가는 길을 잡아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