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샬롬의 복

1030

유 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담임/시카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성경에는 눈물이나 슬픔을 표현하는 용어가 약 9가지 정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지금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 ‘애통하다’는 용어는 가장 그 강도가 높고 그 감정이 짙은 단어에 속한다고 합니다.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슬픔이, 삶의 고통이 찿아옵니다 슬픔이 우리 삶에 주는 것은 눈물, 삶의 두려움, 고통, 무서움, 세상에 대한 원망, 미움입니다.

 

크리스쳔 가수인 윤복희씨의 노래 중에 ‘여러분’이라는 노래에서 내가 외로울 때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 답이 우리 주님의 산상설교 두 번째 말씀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마5:4)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의 주님의 1차 청중은 로마의 압제하에 갖은 고난을 당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고통으로 그들은 많은 질병의 고통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병들어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고 슬픔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과 슬픔에 직면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슬픔이 오면 철저히 슬퍼하고 애통해 하며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의 위로와 만져주심을 경험하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눅6:21)라고 하셨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눈물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눈물은 사랑의 표시요 인정의 표시요 희생의 표시요 슬픔의 표시요 고통의 표시요 그리고 인간의 감정의 극치의 표현입니다.

 

현대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상'(마11:16-19)이 되었습니다. 그저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고독과 허무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요엘 선지자를 통해 –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오라'(욜2:12)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메마른 눈물을 다시 찿아 애곡함으로 사랑과 온정과 화해를 되찿아 복된 삶을 살아야 될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고 신문을 읽고 뉴스를 듣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슨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까? 눈 뜨면 신문을 찿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뉴스를 듣지만 거기에 무슨 위로가 있습니까? 사람들은 세상의 평화를 위해 온갖 시도를 해 보았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국제 연합이 대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확인하고 있습니다. 이제 세상을 위한 위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려 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는 쾌락과 거짓 웃음이 만연한 사회입니다. 하지만 죄와 세상의 비참함 때문에 애통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릴 수 있는 자신만의 자리를 가지고. 슬픔 많은 삶의 무겁고 힘든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서 애통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샬롬의 상태로 이끌어 주십니다. 샬롬은 하나님 위로의 정점입니다. 이 샬롬(평화)은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힘든데 힘들지 않고 불안한데 불안 해 하지 않고, 두려운데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그 심령에 흐르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 초월로 나타나는 하나님 위로의 정점입니다. 슬픔 가운데 있는 내 삶이 하나님의 위로로 샬롬의 경지에 이를 때 고난-슬픔-눈물의 고리가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은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점검하시나이다(요 13:27)’ 고백합니다. 고통가운데 있을 때 기억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돌보고 계십니다.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나 1:7). 슬픔이 올 때 애통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의 깊은 위로와 만지심으로 샬롬에 들어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