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성도의 의무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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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사랑은 기독교의 진수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비롯하여 복음서와 서신서에서 성경은 얼마나 많이 사랑을 설명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사람에게 납득시키고자 하는 핵심을 사랑에 두는 서적이라고 말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의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말한다면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죄의 제도를 세워 세 번까지는 용서했다고 합니다. 매우 급한 성질을 지녔던 베드로가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마18:21)물었습니다. ‘일곱 번까지 용서하오리까?라고 말 했던 일곱이라는 숫자는 완전수로써 인간적으로 최대한의 용서를 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어지간한 관용을 나타낸, 즉 ’이정도면 주님도 충분하다고 하시겠지‘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린 것이었지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인간적인 한계를 넘어선 용서를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눅17:4)

–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더 잘 이해시켜 주시려고 하나의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일만 달란트(약200억원)의 엄청난 빚을 졌는데 왕에게 울며불며 사정하니 왕이 그를 불쌍히 여겨 그 많은 빚을 탕감하여 주었다. 빚을 탕감 받은 이 사람은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런데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약20만원)을 빚진 사람을 만났다 그러자 왜 그 빚을 갚지 않느냐고 하며 그를 감옥에다가 집어넣어 버렸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왕은 분노하여 그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집어넣었다(마18:23-34).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200억 이상의 원죄와 자범죄를 용서함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죄의 빚을 탕감받은 자가 거기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주님 앞에 모순된 존재이겠습니까?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라고 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원수를 맺는 자는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성경에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놓으리라(롬12:20).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성도가 은혜를 베풀고자 할 때 원수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고 결국 죄악에서 돌이켜 회개가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타국에 나가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작은아들을 아버지는 입을 맞추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하므로 그 아들을 완전히 회개시켰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죄를 짓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주님의 판결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변명할 여지가 없는 가련한 처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의 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사람이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살기등등하여 손에 돌을 들고 그 여인을 향하여 던지려는 무리들로 하여금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여 다 쫓아내시고 그 여인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에게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원자탄이라 불리우는 손 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두 아들을 살해한 공산당원 학생을 용서하고 자기의 양아들로 삼아 돌보아 주었습니다. 몇 번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어디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은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