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박한 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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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교회 담임

 

반전과 평화, 환경과 자연주의 운동을 펼쳤던 미국주류 사회의 이단아, 스콧 니어링! 그의 아내인 헬렌 니어링은 ‘소박한 밥상’이라는 책을 출판한 후 세계 곳곳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요리법은 매우 단순하고 간소하다. 허기가 최고의 반찬이고 음식은 소박할 수록 좋다는 식의 요리법을 제시함으로써 경쟁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시대에 새로운 대안적 세상과 또 다른 삶에 대한 지향점을 찾게 만들었다.

소박하게 살려고 한다면, 우리는 함께 같이 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신의 삶은 그렇게 사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우리 안엔 여전히 욕심과 욕망, 이기심과 같은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소박하게 살고자 하면 우리 안에 사단이 우리를 예수님도 끌고 올라갔던 성전 꼭대기로 데려 간다. 에수님은 그 시험을 이기셨지만 우리 인간은 그 곳에 오르면 마치 하나님이 된 양, 교만하고 거창한 삶을 살려고 한다. 그것이 육신의 삶에만 머물면 좋겠는데, 그런 삶이 영혼에도 들어온다. 그러면 우리는 영적으로 복잡하고 대단하며 거대하게 무엇인가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 가운데 가장 왜곡되어서 나타나는 것이 금식에 대한 신앙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금식하는 자들에게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 6:16-18)고 말씀하셨다. 금식은 금식하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 금식을 한다면, 소박하고 조용하며 티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모두 “나 금식합니다”라고 소리만 내지 않았지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다닌다.

그런 식의 금식을 하는 성도들은 목적이 있다. Give and Take의 마음으로 “하나님, 내가 금식할테니, 내게 이것을 주십시오”라는 뜻으로 금식을 하는 것이다. 그 금식이 정말 신앙적일까? 또한 어느 새 금식은 율법이 되어버렸다. 금식을 할 때, 며칠을 해야 제대로된 금식인가? 금식할 때 물을 마셔야 하는가? 마셔야 한다면 몇 리터를 마실 수 있는가? 금식할 때 음식 냄새를 맡는 것은 죄가 아닌가? 등등의 질문을 던지면서 자신이 금식하는 것을 곳곳에 알린다. 그러면 금식은 자기 자신에게는 율법이 되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 때문에 하는 순수한 금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정해 놓고 그 율법에 맞춰 진행하는, 속보이는 금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금식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신앙 행위도 그렇게 보여지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가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을까?

금식을 한다면, 소박한 금식을 하자. 금식의 율법은 알아서 지키면 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금식의 목적은 이제 쓰레기통에 버리자.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참된 믿음의 삶이 갈급하고 간절해서 하는 소박한 금식을 하자. 소박한 밥상은 식탁에 올라온 음식 하나 하나의 모든 맛을 음미하고 깨달으며 느끼어 그 음식들이 내 몸의 살과 피가 되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소박한 금식도 먹지 않기로 결단하는 심령 가운데 비워진 우리 몸과 마음을 채우셔서 하나님을 맛보고 느끼며 나와 함께 하심을 뜨겁게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소박한 신앙의 삶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소박하면 교회세습을 하지도 않고, 소박한 신앙을 가지면 기복적이지 않으며, 소박한 믿음의 삶을 살면 교회를 자기 것으로 생각하는 우상이 되지 않을 것이다. 소박하자. 그곳에 참 신앙의 맛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