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소탐대실(小貪大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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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갈릴리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상대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가시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 거라사라는 이방 지역에 오셨습니다. 그곳에서 주님은 마을 사람들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군대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외에 이 치유의 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돼지를 치던 자들이었습니다. 먹이가 있는 곳으로 돼지를 몰아놓고 지켜보기만하던 그들에게 구경거리가 생긴 겁니다. 귀신들린 자가 낯선 유대인에게로 달려가는 장면을 본 겁니다. “저 사람 이제 큰 봉변을 당하겠구만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귀신들린 자가 갑자기 그 낯선 유대인 앞에 엎드려 절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기괴한 음성으로 그 낯선 유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겁니다. 이 신기한 일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자기들이 치던 돼지 2000마리가 바다로 뛰어들더니 다 죽어버렸습니다. 이 기가막힌 장면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퍼뜩 정신이 든 그들은 마을을 향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 낯선 유대인이 배타고 떠나버리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인 겁니다. 돼지 손실의 책임이 고스란히 자기들 것이 될테니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달려가 마을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겁니다. 예수님 계신 장소로 몰려온 마을 사람들도 다 놀라고 말았습니다. 귀신들렸던 자는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고, 자기 돼지들은 파도에 쓸려 멀리멀리 떠밀려가고 있는 겁니다. 그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돼지의 손실에 생각이 꽂힌 겁니다. 예수라는 저 낯선 유대인이 이곳에 머물면 더 큰 손해를 볼 것같은 생각이 든 겁니다. 만약 예수님을 마을로 초대했다면, 천국 복음도 듣고 또한 병자들이 치유되는 기적도 체험하며 무한한 기쁨을 누렸을텐데, 재물을 더 중시여김으로 그 좋은 기회를 발로 차버리고 만 겁니다.

마태복음 19장에는 예수님께서 한 부자 청년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청년은 주님께 영생 얻는 방법을 묻습니다. 청년은 예수님에 대해 하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고 계신 분이라고 전해들은 것같습니다. 그래서 기대를 가지고 자신의 깊은 고민을 주님께 풀어놓은 겁니다. 영생에 대한 청년의 고민은 율법 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에겐 보편적인 문제였을 겁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율법 앞에 완전한 자가 없으니 말입니다. 청년의 질문에 주님은 십계명을 잘 지키라고 대답해주셨습니다. “그 계명들이라면 어릴 적부터 잘 지켜왔는데, 그렇게만 하면 충분한 건가요?” 청년은 주님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선 이 말씀을 통해 청년의 중심을 보고자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질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은 자기를 다 내려놓아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은 네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웃 사랑의 기준은 이처럼 높은 겁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건 계명이 담고 있는 이 두 가지 핵심 정신을 실천하는 걸 뜻합니다. 주님 말씀에 청년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가진 재산이 너무 많은 청년은 고민고민 하다가 결국 근심 가득한 얼굴로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청년은 구원이라는 무한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바라던 천국행 티켓을 놓치고 만 겁니다.

위 두 가지 사건이 담고있는 영적 교훈은 분명합니다. 이 땅의 작은 것들에 집착하다가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자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신비한 복들을 잃어버린다는 겁니다. 소탐대실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