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수군거림에 흔들리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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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 시카고 기쁨의 교회

 

신약성경 누가복음 9장 앞부분에 보면, 삭개오라는 사람이 예수와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삭개오는 당시 세리장이었고 부자였다고 한다. 한국 역사의 기준으로 본다면, 일제 시대의 돈 많은 부자 친일파와 같은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삭개오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가 보고 싶었다. ‘나 같은 자도 예수가 만나 줄까?’ ‘이렇게 살아도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라는 고민 때문에 삭개오는 예수를 보고 싶어도, 대놓고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성경은 그가 돌무화과나무(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를 보았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때마침 예수는 그를 보기 위해 나무에 몰래 올라 가 있는 삭개오를 보게 되고, 불안하게 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내려오라 명령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머물겠다고 말한다. 이에 삭개오는 매우 기뻐하며 예수와 그의 일행을 진심으로 영접한다. 또한 그는 집으로 모신 예수 앞에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가 계산해서 갚겠다”(눅 19:8)고 회개하고 결단한다. 그런 삭개오의 종교적 다짐에 예수는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제 너도 나의 형제다”(눅 19:9)라고 선언한다.

이 삭개오의 이야기는 시대의 앞잡이로 세상에서도, 하나님에게도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이 예수 앞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이야기이다. 그게 사실이고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 성경 스토리에 딱 한 구절이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누가복음 19장 7절에서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예수)가 죄인(삭개오)의 집에 유하러 들어간다”고 증거한다. 열 구절의 이야기에서 성경은 삭개오의 회개와 구원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7절의 구절만은 옥의 티처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수군거림” “소문” “유언비어” “가짜 뉴스”를 만드는 것이다.

요즘 한국은 가짜 뉴스 때문에 시끄럽다.  정치, 사회, 문화, 경제 등등의 사회 전반에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인터넷과 SNS를 통해 ‘가짜 뉴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 그런 소문과 사회적 수군거림, 그리고 가짜 뉴스는 보수 진영이든, 진보 진영이든 상관없이 재생산해 내고 이용하며 확대시키고 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하기 전에 이미 타인을 대화와 공생의 대상으로 보지 않은 양 극단의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 듣고자 하는 편견과 선입견에 빠져 스스로 가짜 뉴스의 주체가 되고 있고, 수군거림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 소문과 수군거림에 스크린 없이 노출되어 있는 평범한 국민들이다. 지금 우리는 그 어떤 제약과 조건도 없이 “수군거림”의 칼을 제공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량한 국민이 그 “수군거림의 칼”을 손에 쥐고 있으면, 대화와 관계의 테러리스트가 된다. 그 소문이 손에 쥐어지면,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뛴다. 이것으로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어지고, 싸우고 문제를 삼고 심어지는 것이다. 마치 구원의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있는 예수와 삭개오의 만남 속에 사람들은 가짜 뉴스와 같은 수군거림으로 그 구원의 역사에 흠을 내고 잘못되게 만들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경 속에 예수는 다수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소문에 대해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가 삭개오에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문제를 삼고 비난하는 것에 대해서, 신경을 쓰거나 대꾸를 하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수군거림은 수군거림에서 끝나는 것이고, 소문과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닌 이상 긴 생명을 유지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것처럼, 삭개오의 구원 이야기 속에서의 수군거림과 소문, 뒷담화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지 않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신 5:32)는 말이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표현이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진리와 비진리, 사실과 거짓, 바름과 그름의 사이에서 주변의 수군거림과 소문에 흔들리지 말고 정상과 진리, 사실과 바름을 선택하라는 기독교의 정신을 말하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좌에서 들리는 소리와 우에서 나오는 말이 많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어디든 치우치지 말고, 참되고 온전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기도자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