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순종의 영성과 열매

1106

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역은 철저히 주님의 뜻에 따라 감당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사에서 존 칼빈의 영향력은 마르틴 루터 못지 않습니다. 처음 칼빈은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중도에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진로를 법으로 바꿉니다. 그런데 옮겨간 대학에서 칼빈은 개신교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스 문학을 가르치는 볼마르 교수 때문이었습니다. 볼마르 교수는 칼빈에게 신학에 헌신할 것을 권유했고, 루터가 주장하는 교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대학을 떠난 후에도 볼마르 교수는 칼빈에게 독일에서 입수한 종교 개혁 사상이 담긴 최신 책자들을 보내줍니다. 결국24살이 되던 1533년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종교 개혁 운동에 조인하게 됩니다. 칼빈은 학문의 길을 택했습니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서 말씀을 통해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밝혀내는 일도 개혁 운동의 한 축이 된다고 믿었던 겁니다.

당시 프랑스의 상황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 불리했습니다. 왕 프란시스 1세가 카톨릭 교회 신봉자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칼빈도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쓴 글 때문에 몇 차례 감옥에 갇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534년 10월 과격파 프로테스탄트들이 카톨릭 교회의 미사를 비판하는 글을 벽에 붙이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글이 심지어 왕의 침실문에도 붙게되고, 분노한 왕은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들을 투옥하고 이중 35명을 화형에 처합니다. 이때 칼빈의 동생도 순교당하고 맙니다. 위협을 느낀 칼빈은 1536년, 동생들과 함께 파리를 떠납니다. 목적지는 조용히 신학을 연구할 수 있는 스트라스부르크 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곧바로 가는 길이 막히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와 독일간 일어난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우회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 그날 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을 만납니다.

칼빈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기욤 파렐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파렐은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던 인물입니다. 파렐은 칼빈에게 제네바 개혁에 동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간청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신학 연구에 몰두하려는 자신의 계획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파렐은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의 학문 연구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고 선언하오. 만약 당신이 이 주님의 사역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저주하실 것이오.” 그날 밤 칼빈은 한숨도 못자고 갈등합니다. 이날 밤의 심경을 이렇게 기록해두었습니다. “그 때 나는 파렐의 무서운 명령을 듣고 감당하기 어렵도록  몸을 떨었다.그의 음성은 마치 높은 보좌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같았다.” 결국 칼빈은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핍박, 스트라스부르크로 가는 길이 막힌 일, 하루 밤 머물기 위해 도착한 제네바에서 파렐을 만난 일…. 이 모두가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믿은 겁니다. 그날 이후 칼빈은 제네바에서 기독교 개혁 운동에 헌신합니다. 그 결과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 신학의 핵심 교리를 완성할 수 있었고, 동시에 제네바를 그 교리가 실현된 도시로 세울 수 있었습니다. 칼빈의 개혁 운동은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독일 등 주변 나라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한 칼빈을 통해 주님께서 엄청난 역사를 이루신 겁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영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쉬지 않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경건의 훈련을 통해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내게 주신 소명의 십자가, 즉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춰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나서야 하는 겁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남의 간증에 박수만 보내며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간증자가 되어 모두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멋진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