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어른이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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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지역 도서관에 한국 신문이 있구나! 반갑고 흐뭇했다. 한인 커뮤니티가 잘 형성되어 있다는 뜻일 테니, 이제 막 이사 온 사람으로서 당연히 반가운 일이었다. 아쉽게도, 그 반가움은 신문을 펼쳐 들고 1면 기사를 보는 순간, 이내 슬픔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기사 속 두 인물의 얼굴 사진에 낙서와 함께 구멍을 내 놓은 것이다. 흉측한 얼굴로 바뀐 인물들은 다름 아닌, 문재인 대한민국 대통령과 조국 법무부 장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전 신문들을 살펴보았다. 역시나 였다. 누군가 문 대통령을 비롯한 특정 인물들의 얼굴마다 훼손을 해 놓았다. 고의적이고 상습적이다. 누가 그랬을까? 동네 애들이 장난을 쳤을까? 퍼즐 맞추러 매일 오는 동네 백인 할아버지가 그랬을까? 그럴 가능성이 없다는 건 내남이 다 짐작할 수 있는 바다.

정치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미워할 수도 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겠는가. 백번 양보해서, 신문에 난 그들의 얼굴에 낙서를 할 수도 있고, 구멍을 낼 수도 있다. 아니, 아예 불태워 버린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자신이 돈 주고 산 개인 신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지역 공립 도서관(Public Library)에서 남들이 함께 보는 신문을 훼손하면서 자신의 분노와 적개심을 표출하는 건 어른이 할 행동이 아니다.

누군가 그랬다. ‘인생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나이 드는 것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나이 든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나만 생각하던 미성숙함에서 우리를 생각할 줄 아는 성숙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여전히 나만을 고집하거나, 남은 틀렸으니 한 수 가르쳐주겠다며 고집스럽고 편협한 태도로 일관한다면, 그는 나이 먹은 사람인 지는 모르겠으나 어른은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성인은 많은데 어른이 보이지 않는다. 나라가 어려울 때 지혜의 가르침을 구할 어른이 없고, 양편으로 갈라져 싸울 때 양쪽을 품어 안고 중재하거나 방향을 제시할 큰 어른이 없다. ‘저 나쁜 놈들, 저 미련한 인간들, 뭘 모르고 설치는 젊은 것들’ 하며 욕하는 노인은 있지만,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들으려 하고 배우려 하는 참 어른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르는 게 없는 듯 말하는 사람이 어른이 아니라, 알아도 입을 다물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다. 젊은이들이 본받고 싶은 어른은, 많이 아는 어른이 아니라 많이 공감해주는 어른이다. 세상사람 다 욕하는 나쁜 놈이 찾아와도, 먼저 ‘밥은 먹었냐’ 물어주는 사람이 어른이다. 교회에 젊은이들이 없다고 다들 한탄하지만, 이런 어른들이 있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올 것이다.

과거 교회가 핍박 받던 시절, 예배가 끝나면 어른들이 먼저 예배당 밖으로 나가던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박해와 순교의 자리를 향해 먼저 나감으로써 믿음의 본을 보인 진짜 어른들이었다. 이렇듯,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보여주는 어른을 보고 싶다. 예수 믿으면 사람이 저렇게 넓고 깊어질 수 있구나, 흠모하게끔 만드는 어른이 그립다.

이런, 청년들의 원망이 들려온다. 이제 당신이 그런 어른 노릇할 차례 아니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