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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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회 최순봉회장

최순봉 한미상록회장(시카고)

 

우리는 ‘역사’라 하면 언뜻 기록문화를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누가 기록하느냐에 무게 중심을 두지는 않는다. 이 말은 객관적인 기록이란 사실을 잊어버리고 내용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시카고 동포사회의 역사도 과연 객관적으로 쓰이어지고 있는가 하고 생각해본다. 그렇지 못하면 자서전이 되고 만다. 이제 시카고의 한국인 이민역사가 해가 더해지면서 초창기 이민세대가 별세하는 부고를 자주 접한다. 그럴 때면 자신과 고인과의 살아온 삶에 연관을 맺은 과거가 있다면 고인이 살아오는 동안 쌓아 온 동포사회에나 그 개인에게 있었던 업적을 기리기도하고 치적을 더듬어 보기도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나의 경우는 삶에 스며있는 습관이다.

그리고 부고를 접하는 순간 삶이란 것이 자력으로 이어 온 것 같기도 하지만 온전한 자력일 수 없다는 사실이 판명되는 순간들이란 사실이다. 죽기 전에 죽음을 묵상하고 죽음을 대비하여 준비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결론과 담담히 죽음을 받아 드리는 사람을 보지 못한 탓이 삶은 자력이 아니라 기적을 누리는 것 같은 긴장감을 떨칠 수 없게 한다. 그리고 진정한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는 살아있는 세상, 이 세상과 죽음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 저 세상은 건널 수도 없고 넘볼 수도 없는 장막에 가려져있는 계곡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도 나의 믿음 혹은 증거 할 수 없는 상상적인 결론이다. 얼마나 죽기가 싫고 두려우면 죽지 않고 오래 살수 있다는 전설은 모두가 따라하고 지켜보려고 노력하지만 일찍 죽는 사람도 흔하게 보았다. 이렇게 하면 오래 산다는 말을 듣고 그 한 방법인 죽어 자신이 들어 갈 관을 미리 만들어 가까이 두고 까만 옻칠까지 입혀 만지작거리는 사람도 보았고 식탁에서 수저를 먼저 놓으면 일찍 죽는다는 말을 듣고 식사를 끝내고도 수저를 밥그릇에 걸쳐두고 내려놓지 않다가 다른 가족들이 모두 내려놓은 다음 자신의 수저를 내려놓는다는 사람도 만나보면서 자랐다.

그런데 요즈음 와서 그런 사람들을 회상해보면 전혀 이해 할 수가 없는 구석이 있었다. 어릴 때 심부름으로 갔던 집 노인이 관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을 목격한 나는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놀라 등골이 오싹했던 기억하며, 얼마나 오래살고 싶으면 어린 자녀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오래 산다는 말을 따라 수저를 내려놓는 것까지 가족보다 오래 살려는 이기심이 작동하지는 않았나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부끄러운 욕망을 다시 곱씹는다. 고리고 다시 보는 죽음의 현장에는 끝없는 삶의 위선을 보고 허무를 통감한다.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달리 죽은 이에게 화장까지 해서 곱게 꾸미는 문화 속에 살면서 하느님을 믿고 의존적인 삶을 산다고 하면서도 남의 평판이 무서워 죽어가는 자신의 중한 병을 숨기는 위선의 우리 문화가 묻혀있다. 이런 문화를 공유해서가 아니라 위선이 극치에 빠져있는 사람이 자기 집 현관 문안에서는 포악한 악마로의 돌변하여 자신이 낳은 자녀를 폭행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고 시신까지 유기방치하고, 현관문 밖에서는 존경받는 목사요 목사지망생을 가르치는 교수라니 그이에게 배운 목사 지망생은 어떤 목사로 태어날까도 두려운 생각부터 먼저다.

이처럼 허무와 혼란의 질서는 우리의 황패한 사고에서 출발한 그 유물(결과)일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몇몇 지인들과 미국 대선이야기에 휘말린 적이 있다. 그 때 트럼프의 대세론에 대해 ‘단호하게 만약 그가 미국 대통령이 되면 미국은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이것이 나의 심념이었다. 그이 외에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이냐에 대해선 의미가 없다. 그는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의 인격은 타인 인권을 말살하는 곧 악마의 성품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격은 각자가 갈고닦은 결과이지만 인권은 하느님(창조주)이 주신 공평이므로 사람이 사람의 권리를 침해 평가할 권리가 없다는 사실도 그는 모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면 안 된다는 이유다. 그리고 이런 기록의 유형이 역사란 대하, 그 지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