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예수님 이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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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목사(두란노침례교회 담임)

하나님 표 행복을 누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핍박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는 겁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한 박해를 다루면서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뭘까요?’ 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돌에 맞아 피로 범벅이 된 채 고통 중에 거친 숨을 몰아쉬는 스데반의 망가진 육체가 떠오르시나요? 아니면 공회원들 앞에서 스데반이 느꼈을지도 모르는 위압감과 공포심이 떠오르시나요? 또는 거짓 증거로 자기를 죽음의 자리로 내몬 헬라파 유대인들을 향해 분노하고 있는 스데반이 떠오르시나요? 아닐 겁니다.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신 분은 거의 없을 겁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주로 이런 장면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공회원들이 예수님의 제자인 자신을 심판하기 위해 지켜보고 있는데도 천사처럼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장면이나,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고 있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던 장면이 떠올랐을 겁니다. 아니면 갑자기 눈 앞에 펼쳐진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계신 예수님을 보고 황홀해하는 스데반의 모습을 떠올린 분들도 꽤 있을 겁니다. 이 장면들이 오늘 말씀이 진리임을 입증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선 아들 예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스데반에게 큰 상을 주셔서 죽음도 초월하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게 해주신 겁니다.

첫번째 상은 성령님께서 스데반이 복음을 전하고 박해를 당하는 동안 한 순간도 그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해주신 겁니다. 그 상급 때문에 스데반은 자신을 대적하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예수님처럼 죽일 수 있는 공회원들 앞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평안함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공포에 질려있어야 마땅한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표정은 정반대였던 겁니다. 그런 스데반의 비현실적인 그래서 신비하기까지 한 표정을 천사와 같았다 라고 표현한 겁니다. 계속 함께 하고 계신 성령 하나님 때문에 스데반은 초월적이고 완전하며 절대적인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겁니다.

두번째 상은 스데반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여주신 겁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간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직접 확인시켜주신 겁니다. 자신이 들어서 믿게 된 내용을 직접 목격한 스데반은 정말 기뻤을 겁니다. 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기뻐 뛰놀고 싶었을 겁니다. 말로만 들어온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영접하기 위해 서계신 모습을 본 스데반은 죽음을 절망의 대상이 아니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통과 절차로 보았을 겁니다. 스데반은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자신이 본 놀라운 장면을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자신이 직접 목격한 하나님 나라와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스데반의 태도는 훨씬 더 확신에 넘쳤을 겁니다. 당연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직접 바라보며 자신을 받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심판하고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스데반이 드린 용서의 기도에는 저들도 구원 받고 자기처럼 천국을 소유하는 자들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겁니다. 천국을 직접 보고나니 그들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더 깊고 강해졌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두번째 상을 통해 스데반은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었고,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행복을 전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선 스데반의 순교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 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진짜라는 걸 증명해주신 겁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을 지키기 위해 치른 고통의 대가는 하나님표 행복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