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은혜 없음은 장소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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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2015년 9월 2일, 한 장의 사진이 전 세계 사람들을 충격과 슬픔으로 몰아 넣었다.터키 서부보드룸 해안가에 얼굴을 파묻은 채 숨진 세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시신 사진이었다. IS의 위협을 피해 터키로 넘어갔다가다시 그리스로 넘어가던 도중 풍랑에 의해 난파된 것이다.이 참담한 사건을 보도하며 한 신문 기사가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세 살 아이 받아준 곳,천국 밖에 없었다.”

아일란 쿠르디를 받아줄 곳은 이 땅 어디에도 없었다. 자격이 안 되기 때문이다. 비자가 없다. 난민 자격이 없다. 돈이 없다. 법적 근거가 없다. 목숨을 걸고 배에 몸을 실은 세 살 꼬마에게 이 세상은 자격을 묻는다.자격이 없으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천국은이런 세상의 질서를 뒤엎는다. 자격없는 이가 자리를 얻는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2).우리는 그것을 ‘은혜’라 부른다.

어릴 적, 잘 나가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 ‘부도’의 뜻도 모를 나이였으나 한 가지 사실로 인해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의미하는 바를 나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머물 자리가 점점 사라지고 장소가 점점 좁아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살던 집을 빼앗겨 버렸다. 내 방이 사라졌다. 단칸방 삶이 시작됐다.학교와 교회를 옮겼다.은혜 없는 세상에서는 실패한 사람들이 갈 자리/장소가 제한되거나 사라진다. 그 사회가 요구하는 자격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요즘은 안 그러리라 믿지만, 과거 한국에서 여자들이 운전하다가 실수를 하면 남자 운전자들이 소리 지르며 욕을 하곤 했다. “여자가 집구석에 처박혀 있지, 왜 싸돌아다니냐”고. 여자의 자리는 ‘집구석’이었지, 집 밖이 아니었다. 여자에게 공적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여자를 온전하고 동등한 사람으로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는 사람을 사람되게 한다. 차별 없이 자리를 내어준다.은혜가 없다는 것은 “여기는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니에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애인은 안 된다. 여자는 채용 안 한다. 전과자는 가라. 서류미비자는 안 된다.당신들 나라로 돌아가라. 난민은 거절한다. 이것이 비은혜의 세상이다.그러므로 ‘은혜-없음’은 곧 ‘장소-없음’이다.

지난 1월,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지대 소노라 사막에서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 이들에게 물과 음식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스캇 워렌(Scott Warren)이라는 미국인이 중범죄 혐의(유죄 판결시 최고 20년 형)로 기소되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사막의 더위와 추위에 지쳐 쓰러져 죽는 이들이 많기에, 이들의 죽음만은 막으려고 행한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이었다.우리에게 은혜가 무엇인지 가르쳐 준 성경을 펴서 직접 확인해 보자.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의 신분이나 범죄 여부를 확인한 후에 도왔었던가?

강도 만난 자에게 주막의 작은 방 하나 내어주는 일,곧 비은혜의 세상을 은혜의 세상으로 바꾸는 일이다. ‘은혜-있음’은 곧 ‘장소-있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