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방을 비추는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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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 교회)

 

예수 탄생을 찬양하는 시므온의 노래(눅 2:29-32)에서는 “이는(메시야의 탄생)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32절)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얼핏 보면,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이 이방과 세계 만민을 향한 보편적 구원을 위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시므온의 찬양은 그 반대이다. 신학자 리차드A. 호슬리는 그의 책 ‘크리스마스의 해방’에서 “시므온의 노래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저 바깥에 있는’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든 ‘바로 여기’에 있는 ‘이’ 백성이라는 것이 요점”이라고 설명한다. 특별히 그의 시 가운데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는 표현은 실질적인 주체가 이방이 아니라 이뱡을 향해 빛을 비추는 자라는 것이다. 태양계를 예를 든다면, 지구를 초록별이라고 하지만 사실 지구는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는 행성이다. 태양의 빛을 받아 초록색을 반사한 지구는 초록별로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지구는 태양이 없다면, 결코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낼 수 없다. 이처럼, 시므온이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 예수 탄생을 찬양하는 것은 메시야 오심이 이방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되기 전, 이방을 향해 빛을 비출 수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가 더 중요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므온의 찬양 속에는 만민과 이방이 표현되어 메시야 오심이 그들을 향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결코 그들을 향해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노래는 아니다. 우선 이스라엘과 유다가 메시야 오심에 준비하고 예비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메시야가 오는 유다 땅과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특별한 헤택을 받고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게 됨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을 노래로 영적 도전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현대 교회의 현실로 이야기한다면, 2000년 전 예수 탄생이 각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제대로된 의미로 세상에 전해지도록 하고자 한다면, 지금의 우리, 곧 2017년의 성탄을 기다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에 바른 빛을 비추는 역할과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담에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한다. 제 아무리 우리가 빛의 자녀요, 먼저 구원받은 자라 부름을 받는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깨져 있고 망가져 있고 썩어있다면, 우리는 결코 세상을 비추는 빛의 역할을 전혀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전혀 빛을 내지 못해 죽어가는 별이 되어가고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최근 자주 듣는 교회의 평가가 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다”

교인은 자기 입맛에 교회를 옮겨가고, 교회 쇼핑을 한답시고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리면서 TV 오디션의 평가자처럼 교회와 목사, 성도의 수준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 목회자들도 교회가 분명히 침체가 되어가고 있음에도 자기 비판과 성찰은 하지 않은채, 전도와 부흥 프로그램과 유명 강사만을 의존하려는 과거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회도 편법과 불법의 경계선에서 세상법에 걸리지 않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처럼 떠들고 다니는 것이 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탄생은 우선 유다와 이스라엘, 곧 현재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에게 이방을 비추는 빛의 자녀로서의 결단을 이루게 하는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므온 노래의 가치를 충분히 살리지 못하고 있다.

회개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곳곳에서도 많은 외침이 들린다. 성탄을 앞둔 지금에도 많은 이들은 최소한의 기대를 가치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순간 바꾸고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이제 더 이상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이방을 비추는 빛으로서의 모습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2000년 전 시므온의 노래가 귀에 들린다. 그러나 이제 그 노래가 천금보다 무거운 영적 훈계가 되어 가슴에 새겨진다. 곧 유일한 기회가 지나간다. 다시 초대교회 때로, 종교개혁 때로 돌아가고자 하는 강직함으로 이방을 비추는 빛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