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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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국 목사(횃불트리니티 총장 어시스턴트/횃불재단 DMIN 스태프)

이삭은 예수님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닮았다. 예수님처럼 출생과정이 기적적이었다. 예수님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방식으로 태어나셨다. 동정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태어나셨다. 이삭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 사라는 91세였다. 사라의 경수는 끊어진 상태였다.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이 없이는 이삭의 탄생은 불가능했다.

 

이삭은 웃음의 아들이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으로, 여기에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숨어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고 약속했을 때, 아브라함은 웃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 17:17-18). 오래 기다리다가 지치면 믿음이 약하게 된다. 기다림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잊을 만 하면 약속을 반복해서 주신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약속이 나오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같은 약속이 반복하고 또 다른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런 과정이 반복한다. 이는 사람을 지치게 한다.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한다. 심지어 약속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약속을 해 놓고 곧 이루시지 않고 시간을 끌면서 지치도록 하는가? 이는 우리를 더욱더 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바닦을 쳐야 강해진다. 바닦을 쳐야 숨 쉬는 것도 귀한 줄 안다. 바닦을 쳐야 자아가 죽는다. 바닦을 쳐야 마음이 가난해 지고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게 된다. 그래야 하나님의 성령이 들어갈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모든 욕심과 자기를 의지하려는 성향을 제거할 수 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밑바닦으로 밀어 넣는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치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 믿음이 그냥 생겼겠는가? 그렇지 않다. 바닦으로 내려가기까지 철저히 부서지고 무너졌기에 가능했다.

 

바닦을 치고 있는가? 하나님은 너무 멀리 계시고 과연 하나님이 돌보기나 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가? 하나님이 자금 당신을 훈련시키고 있다. 지금은 힘들지만 이 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은 분명 다시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브라함은 기다려야 하기에 웃는다. 하나님이 또 다시 같은 약속을 주시자 허탈한 마음으로 웃는다. 아브라함 뿐만 아니라 사라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사라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라고 대답한다 (창 18:12).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때가 되어서 아들이 태어났다. 그러자 사라가 고백한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 21:6). 아들을 낳고서 웃었다. 아들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을 때에 웃었다. 그때의 웃음은 어의없는 웃음이었다. 기가 막혀서 웃는 불신앙의 웃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웃음은    정말로 기쁘기 때문에 웃는 기쁨의 웃음이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