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종전선언은 적화통일의 전단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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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한미자유연맹 부총재

 

오는 2월 27, 28일에 베트남 하노이에서 미.북간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한다. 베트남은 1975년 공산월맹이 월남을 적화했으며, 북한의 최대혈맹 국가라는 큰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미 행정부에 따르면, 북한의 일부 비핵화에 대하여 종전선언, 북.미간 관계개선, 미국의 평양연락사무소 개설, 대북제재 일부해제등 여러가지 상응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큰일이다. 이제는 미국과 한국의 언론들을 통하여 아무렇지도 않게 적화통일의 전단계인 종전선언, 평화협정얘기가 나오고 있다. 재판없는 수많은 공개총살과 김씨 정권에 관련된 작은 실수로도 전가족이 수용소행을 당하는 무시무시한 김정은 정권이 마치 정상국가로 묘사되고 있으니 말이다. 미.중 핑퐁외교와 수교를 시작할때와 1975년 베트남 적화당시의 미국 정권은 지금과 같이 모두 공화당 정부였다. 많은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기대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트럼프 대통령은 현재 러시아 스캔들에 대한 기소, 수사와 야당인 민주당에 의한 탄핵 그리고 미국 언론에 대한 트럼프 거부감을 회피하려고 북한 문제를 개인적으로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에 대하여 어떠한 큰 기회와 선물을 줄지 모를 매우 위험한 시기 이다. 이런상태에서 한국과 미국내에서도 모두 자기 생계에 바쁘다는 이유로 깊은 안전 불감증에 빠져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5일 신년 국정연설에서 북한 김정은과의2차 미·북 정상회담이 오는 27~28일 베트남에서 개최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북회담에서 종전선언이 맺어지면 평화협정, 평화체제 그리고 국내에선 낮은 단계 연방제 시동이 걸린다. 당장 미군이 모조리 나가지 않아도 남북중 Red Triangle(유물론 공산주의 세력)이 견고해지면서 한미동맹은 치명적 타격을 입는다. 결과적으로 북한에선 김일성 왕조가 지속되고 남한에선 친북 세력이 강화된다. 한국과 미국내 많은 세력들이 소위 한반도 평화와 남북한 교류의 명목으로 주체사상과 연합해 갈 것이다. 현재도 많은 한국과 미국내 사람들이 <종전선언>을 위해 열심으로 부르짖고, 많은이들은 방관하며 동조한다. 다행이 지난9일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시진핑 회담이 틀어지면서 <법적인 의미의 종전선언>은 물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 생명줄이 조금 더 연장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미북 간의 <정치적 의미의 종전선언>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런 일이 터지면, 남한 내 김일성 세력은 더욱 발호할 것이다. 한국은 서서히 그리고 브레이크 없이 복지강화로 포장된 사회주의, 민족주의를 가장한 주체사상의 늪에 빠져갈 것이다. 일부 언론들과 전문가들은 ‘베트남’이라는 국가가 사회주의 국가이지만 자본주의식 경제발전을 이룬 개혁, 개방의 상징처럼 이야기했다. 그런데 회담장소가 북한이 원하는 ‘하노이’로 결정되었기에 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이 회담에서는 ‘북한으로부터 무엇인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옳지 않다고 본다. 북한이 원하는 시나리오데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움직이고 있다. 베트남을 2차 북미정상회담 장소로 정한 것에는 북한의 음흉한 전략과 상징성이 내재되 있다. ‘하노이’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도시이며, 베트남 사회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북베트남의 수도였고, 통일된 후에도 사회주의 베트남의 수도이다. 그리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북 공군의 묘지가 하노이에서 가까운 곳인 ‘박장성’에 있다. 베트남도 분단국가였다. 결국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공산주의 베트남으로 통일되었다. 북한과 북베트남 은 1950년 1월, 수교를 맺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1951년 8월 말 호앙 비엣 북베트남 민족통일전선 부주석이 방북, 전투를 독려했고, 항프랑스 전쟁 시기 영웅인 딘 눕은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승전소식에 고무됐다고 할 정도로 북한과 북베트남은 국가 관계를 넘어 형제적 관계였다. 특히 1957년 호찌민의 방북과 1958년 김일성의 베트남 방문 등을 두고 북한은 “친선협조 관계를 새로운 높은 단계에로 발전시킨 역사적인 계기”라고 평가한다. 북한의 자료에 의하면 1964년부터 1969년까지 무기 10만 정, 군복 1백만 벌 등 물자지원에 이어 공병부대와 공군부대를 파병했다. 북이 베트남전쟁에 지원한 무기, 탄약, 군수물자 등을 합산하면 당시 북측 돈 1억 7천 5백만 원에 달한다.

적화통일이 눈앞에 와있는 국난의 와중에 한국민들은 사분 오열하며 서로 싸우고 있다. 일부 세력들은 미국과 트럼프 대통령의 북폭과 강경한 북한 압박만을 기대하며 북한에게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1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왔던 김성일과 황윤길의 서로 다른 보고가 상기된다. 김성일은 절대로 일본의 침입이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였다.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조선은 일본에게 시간을 벌어주며 조선은 대비하지 못했다.  그후 7년 임진왜란의 참화로 온 조선은 쑥대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