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질문이 이끄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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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세실과 모리스가 미사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다. 세실이 물었다. “모리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모리스가 대답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신부님께 한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세실이 먼저 신부님에게 다가가 물었다. “신부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님은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다. “형제여,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엄숙한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 세실로부터 신부님의 답을 들은 모리스가 말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보겠네.” 이번에는 모리스가 신부님에게 물었다. “신부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신부님은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제여,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다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질문의 중요성을 말할 때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다. 어떤 질문이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뻔한 질문에는 뻔한 답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사는가. 인생에 화두처럼 붙들고 씨름하는 질문이 있는가. 어떤 질문을 던지며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자란 우리들 대부분은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주입식으로 던져준 것을 외우기 바빴고, 질문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불온하거나 불편한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이런 문화가 가장 심한 곳이 있다면 아마도 교회가 아닐까.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는 “그냥 믿어”였다. 질문을 던지기보다 그냥 믿고 아멘하는 것이 좋은 신앙으로 여겨졌다. 궁금해 하거나 질문을 던지면 ‘의심 많은 도마’ 취급을 당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질문 없는 그리스도인, 질문 없는 교회를 낳았다.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교회에서 배운 것들이 일상에 적용이 안 되는데 묻지 않는다. 질문이 없으니 주체적 신앙이 있을 리 없다. 맹목적 신앙만 남는다. 목회 세습을 한 목사의 소위 ‘영적 해석’에 한 목소리로 화답하는 그 ‘아멘’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성경 속 믿음의 선조들은 질문하는 사람들이었다. 시편을 보라. 끊임없이 질문한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선지자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사야, 예레미야, 요나, 하박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탄식하며 질문했다. “하나님, 저 불의한 이들을 왜 보고만 계십니까?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살아계시기는 한 겁니까?” 예수님 역시 온몸으로 부르짖어 물으셨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인형 중에 버블헤드라는 것이 있다. 목 부분에 스프링이 달려서 늘 고개를 끄덕인다. 사람들 중에도 버블헤드가 있다. 누군가 말하면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설교자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버릇처럼 끄덕인다. 생각 없는 아멘은 늘 자동이다. 신앙은 버블헤드가 아니다. 주체적 신앙은 질문한다.

사도행전 17장에 등장하는 베뢰아 사람들은 질문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무조건 거절하지도, 무조건 믿지도 않았다. 성경을 펴서 ‘이것이 그러한가’ 질문을 던지며, 마치 심문하듯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 후에 그들 중에 믿는 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들의 신앙이 얼마나 단단했을지는 자명한 일이다. 목적이 이끄는 교회보다 질문이 이끄는 교회가 낫다. 당신의 질문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