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참새와 제비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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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목사(시카고 기쁨의교회 담임)

교회가 더 이상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는다. 부흥은 커녕 생존의 문제로 급급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최근 한국교회 각 교단의 교세 통계를 살펴보니, 정체 또는 쇠퇴하고 있었다. 이민교회의 현실은 더욱 어렵다. 나름 수평이동으로 교회가 성장세를 이루기도 했지만, 이마저도 끝을 보이고 있다. 당연히 젊은 세대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를 찾지 않는다. 그러니 자녀들 세대의 북적임이 교회에서 사라진지 꽤 오래된 교회들이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시편 84편은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셀라)”(시 84:1-4) 시편 84편의 기자인 다윗은 주님의 전을 사모한다. 그래서 그는 “내 영혼이 여호화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2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쇠약함”은 아파 쓰러졌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좋아 기절할 정도가 되었다는 의미이다. 다윗은 그렇게 성전을 좋아했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라고 말하면서,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다”(4절)고 부러워한다.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주님의 전에 오기를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다윗이 정신적이고 신학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전에 있기를 사모하자고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다윗은 두 발로 주의 전을 찾아,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기뻐하고 행복해 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불러진 찬양이 이 84편의 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찬양의 삶이 현대의 우리 교회 안에서는 사라지고 있다. 주님의 제단에 머물게 된 참새와 제비보다는 세상의 것에 빌붙어 어두운 그늘 뒤에서 오감의 만족을 추구하는 존재가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그늘진 세상 속에서 표피적 만족을 느끼며 천날을 사는 것보다 하나님 성전의 문지기로 거룩한 삶을 실천하며 주의 장막에 하루를 사는 것이 더욱 큰 기쁨입니다”(10절)

과거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청년시절에는 교회에 가면 자장면 한 그릇을 먹을 신앙의 친구가 있었고, 한 잔의 커피를 사이에 두고 깊은 고민을 나눌 믿음의 선후배가 있었다. 교회 가는 것이 마냥 행복했고 좋았다. 다윗의 고백도 세상의 천날보다 교회에서의 하루가 더 많은 영적 만족을 주는 곳이라 한다. 사실 시간이 지났을 뿐, 교회는 달라진 것이 없다. 다시 모이면 우리는 자장면 한 그릇을 나눌 사람이 있을 것이고, 커피 한 잔에 이야기를 풀어낼 그들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단지 모이지 않을 뿐이다.

“풀을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사 40:8)는 말씀처럼, 아무리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으로 교회에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교회는 변하지 않았다. 교회는 구원의 반석 위에 있고, 진리과 복음의 출발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를 향하는 마음을 바꿔야 한다. 물론 세상의 흐름에 뒤쳐져 있고 흥미로운 것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나, 진리와 복음이 이곳에 있고 생명과 구원은 교회에서 찬양되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교회를 찾아오는 결단을 해야 한다. 참새와 제비처럼 교회에 보금자리가 있다는 마음으로 다시 교회를 영혼의 고향처럼 찾아가야 한다. 목회자와 유급사역자들만이 주인처럼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라, 성도들이 나의 집, 나의 고향, 나의 처소라는 마음으로 교회의 북적임을 회복해야 한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절)

이 말씀을 이제 교회를 향하는 발걸음으로 실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