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태초에 노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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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시카고 기쁨의 교회 담임목사

 

교회에는 “준비찬양”이라는 것이 있다. 예배 전이나 교회 행사 전에 시간을 때운다는 목적으로 교회의 복음성가나 찬송가라는 것을 몇 곡 함께 부르곤 한다. 그리고 나서 본식을 진행한다. 종교개혁 시절부터 개신교 교회에서는 “말씀”(Sola Scriptura) 중심의 예배가 강조 되다 보니, 예배 중 찬양은 로마 가톨릭 예전의 중심처럼 여겨져 은연 중 무시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와서, 마치 한국교회에서 찬양은 음식의 전식(appetizer)처럼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있다. 교회 안에서 제의적 목적으로 불려지는 모든 노래는 사실 종교적 의미가 들어가 있다. 달랑 기타 하나 들고 성도들 앞에 서서 “목사님 오실 때까지 찬양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불려지는 노래라고 하기에 하나님의 찬양은 그 가치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크다.

성경에는 찬양을 잘 했고 많이 만들었던 한 인물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다윗”(David)이다. 다윗은 시편 73개의 노래를 지었고, 다양한 악기로 찬양하며 성가대와 같은 조직을 구성해 하나님을 경배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다윗은 성가대 대장이나 찬양 작곡가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곧바로 왕업(Kingwork)으로서 한 일이 현직의 왕이었던 사울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일이었다 (삼상 16:14-23) 사울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더 이상 왕으로써 인정받지 못할 때, 하나님은 이새의 막내였던 다윗을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바로 사울왕을 끌어내고 왕위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아니, 할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에 다윗은 악령에 씌워져 매일 밤을 고통 속에서 보내는 사울왕에게 수금이라는 악기로 노래를 연주하는 “섬기고 봉사하는 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곧 폐위가 되어 내리막 길을 걷게 될 사울 왕 앞에서 다윗은 ‘내가 왕이요. 당신은 내려 오시오”라는 명령 대신에 노래와 악기로 아픈 사울왕을 치유하고 섬기는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장로교의 영성가인 유진 피터슨 목사는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왕의 기름을 부음을 받고도 겸손과 섬김의 자리에서 진정으로 “왕과 같은 제사장의 역할”(벧전 2:9)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다윗이 아픈 사울왕을 섬긴 도구가 “음악”이었다는 것이다. 라틴어로 뮤지카(Musica)는 영어의 뮤직(Music)의 어원인데, 그 뜻은 “질서와 조화”라고 한다. 곧 음악이라는 것은 질서를 잡고 조화를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사실 사무엘상 16장에서 사울왕이 “악령”에 지배를 받아 정신적인 고통을 받는데, 여기서 악령은 곧 창세기 1장 2절의 “혼동과 공허와 흑암”의 근원을 가진 악의 실체이다. 사울이 악령의 지배를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곧 “무질서와 어둠과 허무”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의미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무질서와 불균형을 만들어내는 악령을 상대로 질서와 조화를 울려 퍼지게 하는 현악기를 연주한 것이다. 그 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 16:23)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노래는 악령을 좇아내고 영혼을 깨끗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은 준비를 위한 순서가 아니라, 본 예배를 채워야 하는 중요한 예식 가운데 하나이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계셨다. 창세기 1장의 근거대로 본다면, 태초에는 세상이 무질서와 혼동으로 가득했다. 그 안에 하나님은 모든 세상을 질서와 조화로 만들었다. 혹시 그 태초에 하나님은 콧노래를 부르면서, 뒤죽박죽인 세상을 순서와 정열에 맞게 창조하지 않으셨을까? 음악은 하급의 기독교문화가 아니다. 그 자체가 창조의 도구였다. 주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노래하자. 그것이 곧 세상을 재창조하는 출발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