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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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남수 목사(순복음충만교회)

살다보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맞닥뜨린 문제 앞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데, 도대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힘겨웠던 기억이 아마 누구에게나 한두 번쯤은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 21장에 등장하는 사라의 종 하갈도 그랬습니다. 당장 떠나라는 본처 사라의 거센 요구에 떠밀려 그녀는 별 수 없이 어린 아들을 데리고 황량한 빈들을 향해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실 물은 다 떨어졌고, 이스마엘은 사경을 헤맵니다. 그리고 결국 하갈을 그렇게 그곳에 주저앉아 통곡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갈은 속수무책으로 광야로 나가서 그저 주저앉아 울고 있는 하갈, 그의 모습은 너무나 무력해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갈의 통곡이 그렇게 그저 무력하기만 한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하갈의 광야경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갈이 처음 이스마엘 가졌을 때, 사라의 학대로 인해서 하갈은 이미 광야로 도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망간 그곳 광야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내가 너에게 많은 자손을 주겠다. 자손이 셀 수도 없을 만큼 불어나게 하겠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하갈은 광야 그 곳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무나도 생생한 축복의 약속을 받습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하갈은 감격에 겨워 그 경험이 이후에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지어 하나님을 두고 ‘보시는 하나님’이라 부르고, 또 그 장소를 두고 ‘브엘라헤로이’ (보시는 하나님이 계신 샘)라고 불렀던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 발로 도망 나온 그곳, 자신을 학대하는 사라가 있는 아브라함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을 만큼 하나님의 임재 경험과 그를 통해 받은 약속이 너무나 생생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하갈이 지금 다시 광야 한가운데서 울고 있습니다. 마실 물이 없어 다 죽어가는 아들의 모습을 차마 지켜 볼 수 없어 멀리 떨어진 곳에 마치 시신을 내려놓듯이 그렇게 내려놓고 아들 있는 그곳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울고 있습니다. 지금 하갈이 흘리고 있는 그 눈물은 이전에 광야에서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기억하며 우는 눈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울음은 무력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우는 울음이 아니라 그 옛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는 울음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 통곡이 아니라 기도였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백성들의 탄식과 울음을 기도로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살이하던 이스라엘의 신음과 탄식을 두고 하나님은 “내가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하셨습니다. 병들어 죽게 된 히스기야 왕의 눈물을 두고도 하나님은 “내가 그 눈물을 보고 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갈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자신의 가장 소중한 아들 이스마엘을 하나님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력함을 가지고 유력한 그분 앞에서 통곡했습니다. 그 무력함 때문에 오히려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광야에서 눈을 열어 샘물을 발견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하갈은 드디어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 눈을 가지고 본즉 샘물이 바로 옆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에게 반드시 믿음의 눈을 가졌을 때 비로소 샘물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 성경에서 하갈은 우리 인생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를 만나도 여전히 우리가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분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순종하기로 결단할 때, 우리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때로 바뀌어 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