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1330

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한국의 YMCA 설립자 브로크만 (Brockman, Frank M.) 선교사는 1878년 5월21일에 미국 조지아 주 더글라스(Douglas)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2년 조지아 주립대학(Georgia State University)을 졸업하고 YMCA에 몸담아 활동을 하다가 27세 되던 1905년에 한국 파송 선교사로 내한하여 ‘파락만’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사역을 했다. 한국까지 오게 된 배경에는 형인 플레처 브로크만(Fletcher S. Brockman 1867~1944)의 영향이 컸다. 형 플레처는 벤더빌트 대학에서 수학하던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 온 윤치호의 친구였고, 1901년부터 중국 YMCA의 총무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에서 자신과 함께 YMCA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동생 프랭크 브로크만을 설득하여 한국으로 가도록 했다. 1905년 내한한 프랭크 브로크만 선교사는 1927년 한국을 떠날 때까지 청소년들의 직업 교육, 농촌 운동에 헌신 했으며, YMCA의 기틀을 다지는데 기여했다. 당시 한국교회 구성원들은 대체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들이 많았으며 청년운동 또한 미미 했기때문에 조국을 잃고 실의에 빠진 한국의 청년들에게 YMCA를 통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주었다. 1910년 6월에 한국 학생운동 사상 최초로 개최된 기독교 학생 하령회라는 수양회를 통해 YMCA 운동이 확산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이승만는 YMCA 간사로 사역 하면서 브로크만과 함께 수많은 학교를 돌면서 전국적으로 청년 운동을 전개하며 학교마다 YMCA 학생회를 조직 하였다. 이듬해 1911년 6월에는 개성에서 제2회 학생 하령회를 개최하여 21개 학생 대표들이 모였는데 그때 강사로 참여했던 이상재, 윤치호,이승만,김정식,양전백,김규식은 참여한 학생들에게 민족애를 되새겨며 국권회복과 항일정신을 고취한 의미있는 수련회가 되었다. 한일 합방후 삼엄한 일제 치하에서 조선기독교 청년 연합회를 조직하고 브로크만 선교사가 초대 총무직에 취임하여 서구문명에 발맞추어 전문직업 교육을 활성화 시켰다. 그는 청년 운동에 거목 이상재와 힘을 합하여 일제 강점 후에도 YMCA를 유일한 전국 규모에 민간단체로 활성화 시켜 나갔다. 그는 마지막 생애를 다할때까지 학생운동, 청년운동, 농촌 운동에 전념하여 한국 미래를 이끌어갈 차세대 지도자들을 많이 발굴하게 되었다. 청년 운동의 일환으로 문서선교를 위하여 선교잡지 조선 청년의 발행인겸 편집인으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특히 YMCA 미국국제 본부를 방문하여 농업 전문가들을 파송해줄것을 요청하여 전문직 10여명의 기술자들과 재정원조, 농업 기술까지 도입하는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105인 사건으로 이승만, 김규식은 해외 망명길에 올랐고 일제의 죄악성을 비판하던 질레트는 국외로 추방을 받는 수모를 겪었다. 그외 윤치호나 지도급에 있는 인사들은 체포되거나 파면을 당하였다. 그때 뒷 수습을 브로크만 선교사가 감당하게 되었다. 1916년 유치호가 석방 되었을때 자신의 총무직을 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백의종군하여 학생운동과 청소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는 그의 겸손이 미담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오직 한국 젊은이들을 깨우는 YMCA운동에 전념하다가 동료선교사 권고로 35세가 되어 브로크만 선교사는 1912년 35세의 늦은 나이에 제시 윌리스(Jessie Willis)와 결혼하여 2남3녀를 두었으나 첫딸 바바라(Barbara)를 잃고 말았다. 안타깝게도 브로크만은 농촌 운동이 본격화될 무렵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를 위해 1927년 미국으로 귀국하여 2년 후인 1929년 6월 10일 51세로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유언대로 1915년 사망한 어머니(Brockman, W. A.)와 1922년 여덟 살에 죽은 딸이 묻힌 양화진에 브로크만 선교사 역시 영원히 한국을 사랑하는 땅에 안장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교회사 학회-네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민경배-한국 기독교회사, 전택부-양화진 외인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