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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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 나눔교회 담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서 웰본 (Arthur G. Welbon, 吳越璠) 선교사 가정은 한국 복음화를 위하여 순회 전도로 헌신으로 섬겼던 ‘길 위에 전도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서 웰본의 청소년 기는 가정 환경이 열악하여 우울한 시기를 거쳐 가야만 했다. 그가17세에 어머니가, 19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이 있었다. 그후 철도 회사를 잠시 다니다가 어떤 사건으로 목회자에 대한 꿈을꾸고 학업을 다시 하게 된다.

시카고에 있는 무디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이후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 있는 매캘러스터 (Macalester College) 대학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34살 나이로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받았다. 1900년에 도착하여 현지 적응과 언어 훈련을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내한 1년 뒤인 1901년 9월 서울에서, 1899년부터 조선에서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던 사라 누스(Sarah Harvey Nourse 1872~1925) 선교사와 결혼을 하게된다.

웰본의 부인 사라는 남편 아서 웰본 가정과 전혀 다르게 명성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펜실베이니아 주 의회에서 하원으로 오랫동안 일했고 조부는 펜실베이니아의 장로교회에서 20년간 목회를 하였고 아버지는 법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녀가 19세 되던 해에 모친이 사망하면서 장녀로 가족을 돌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신앙심이 강한 웰본 사라는 선교의 콜링을 받고 아서 웰본 보다 1년 먼저 한국에 들어와서 여성 전도사업을 주도하게 된다.

아서 웰본(Arthur G. Welbon)선교사가 1903년 6월 작성한 보고서에 기록한 글에 의하면

“제가 맡은 배천과 강원, 두 지역에는 60여 개의 도시와 마을에 신자들이 살고 있습니다. 각 지구를 두 번씩 순회하며 여행 하였고, 배천에서는 겨울철 수련회도 한 차례 가졌습니다. 이 다섯 번의 여행은 각각 평균 1,000리 길이었으며, 총 124일이 걸렸습니다.” 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안동을 비롯해 영주와 문경, 상주, 봉화 등 경북 북서부의 시골 지역 곳곳을 다니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개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아내와 함께 경북 오지의 농촌과 산촌에서 성경공부를 통한 선교에 주력하여 지역 복음화에 공헌했다. 그는 관할 지역 교회의 설교를 선교사가 독점하지 않고 한국인 조사와 영수에게 맡겨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당시 유교 사상과 양반 중심의 계급 구조가 뿌리깊게 자리해 있었던 안동 지역에서 주로 사역했던 웰본 선교사는 당시 국가의 몰락으로 유교에 대한 실망감을 갖기 시작했던 양반 가문은 물론 평민 등 모든 계층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웰본 선교사가 관리하며 7명의 성도로 시작된 안동교회는 1주년 기념예배때 70명의 성도로 늘어났고, 2주년 기념예배에는 200명의 성도들이 참석할 만큼 폭발적인 성장을 이뤘다.

아서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했던 사라는 남녀가 내외했던 당시 남자 선교사가 여성들을 상대로 전도 활동을 할수 없어 부인이 여성 성경 공부반을 열어 복음을 전했다. 가부장제의 위계질서 안에 갇혀 있던 안동의 여성들은 선교사의 위로와 복음의 말씀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났다. 또한 한국 교회사에 대표적인 부흥운동으로 기록된 평양 대부흥운동과 그에 앞서 1903년 여름 미국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로부터 시작된 원산 부흥운동보다 국내 최초의 부흥운동이 황해도 배천 지역에서 일어난 웰본의 부흥 운동이라고 미국 UCLA 옥성득 교수가 메리 바렛 선교사의 글을 통하여 제시한바 있다. 조선땅을 밟으면 영혼 구원을 위하여 순회 전도에 열정을 품고 예수의 흔적을 남긴 그들은 영원히 기억 될것이다.

참고문헌 : 양화진의 선교사들의 삶, 크리스챤 신문, 한국기독신문,CBS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