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홍수와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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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후(TV탤런트/네이퍼빌)

“아침은 빛나라 이강산 은금의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애국가의 첫머리이다. 1950년 한국전쟁에서 3개월천하를 누렸던 짧은 순간에도 저들은 놓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세뇌를 시켰던 덕분에 내기억 속에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있는 가사다. 이것 말고도 또 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의 죽음을 슬퍼말아라”하면서 깃발을 덮어 달라는 적기가다. 노무현 정부때 운동권들을 청와대에 모아놓고 소주파티를 벌리면서 소주와 감동에 취해 눈물을 흘렸다는 노래다. 우리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간결한 표현대신 무슨 위원회같은 길고 긴 이름따위가 왜 그렇게 필요했던지 이제야 알것 같다. 먼저 인민이란 낯선 낱말 부터이다.  “백성”과 사람”이란 말의 조합부터가 수상적지 않은가? 사람이란 오직 수령님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다 어중이떠중이 라는 말처럼 들린다.  남쪽의 일부 지식인 가운데 절반쯤 그쪽으로 기운 사람들이 소위 “민중”이라는 말을 또 지어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시민” 이라는 낱말의 뜻까지 바꾸어 버렸다. 가슴에 제 부모의 상장도 달지 않는 사람들이 노란리본을 신주단지처럼 몇년씩이나 모시고 다니면서 소위 “촛불시민혁명”이라면서 장례행열 위에 성을 쌓고 또 쌓아 올리더니 드디어 이제 그 목마른 정권을 잡았다.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낱말이 이렇게 큰 무기가 될 줄을 누군들 알았으랴? 물론 새벽녘 닭이 울기도 전에 “늑대야!”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이 왜 없었겠느냐마는 어쨌든,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을 하고 예상도 하고 경고음을 울렸지만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모두가 일사분란한 싸움이었을까?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점잖은 말로 스스로의 허물을 감싸안기에 바빴지 목숨을 걸고 적기가 같은것을 부를수있는 용재는 없었다. 그렇다고 누구를 나무랄 자격은 없다. 어차피 시작부터가 한의 싸움이 아닌가? 왕조 500년동안 짐승처럼 서러움을 당했던 서출들 가슴에 서린 한을 진작부터 내것으로 만든것이 바로 좌파다. “한 이란 우리의 운명이요DNA” 라고 우기는 사람들에게는 한풀이라는 씻김굿이 필요하다. 다시말해서 정해진 수순데로 가고있다는 말이다. 권부는 물론이고 교육부총리,문화부까지 완장찬 사람이 점령을 하고 국정오대과제를 선포하면서 드러난 얼굴은 “그놈의 헌법”은 물론이고 실정법이라는 미미한 저항에 펄펄 끓른 기름항아리를 태연하게 들어 붓고있는 형상과도 같다. “너 뜨겁니? 너 아퍼? 첨단기술과 산업자원을 다 헐어 버리고 다시 멍애와 쟁기질을 하라니 그것이 싫여? 한강에 보를 쌓고 물난리를 막아낸게 그게 그렇게 잘한 일이라고? 어디 이런 착한생각은 어떨가? 세종로 한복판에 한반도기를 꽂고 국호를 고려연방공화국이라고 부르면 어쩔텐가? 하하하. 우리들 가슴에 서린 한은 이따위 씻김굿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면서 내어 뱉듯 쏟아내는 것마다 한이 서려있는 모양새다. 41%의 지지와 59%의 반대자들은 다 어느나라 사람들인가? 겁이 없어도 너무나 없다. 잘 먹여살린 죽창부대와 땡깡쟁이들이 그렇게도 막강한가?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어느날에 천둥소리를 낼지 모르지만 잠자고 있는 민심이란 봇물과도 같다. 백성의 입을 틀어 막는다는 것은 홍수를 막는것 보다 어렵다 <防民之口 甚於防水>. 하늘이 두렵다는 사람이 어디 이시대의 노인들 뿐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