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환대와 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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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환 목사(시카고기쁨의교회 담임)

다음의 맞춤법 질문에 답을 해 보자. ‘역할’이 맞을까, ‘역활’이 맞을까? ‘웬만하면’이 맞을까, ‘왠만하면’이 맞을까? ‘나중에 봬요’가 맞을까, ‘나중에 뵈요’가 맞을까? ‘-기를 바라’가 맞을까, ‘-기를 바래’가 맞을까? 전부 앞의 예가 맞다. 틀렸는가? 아마 맞는 낱말을 보아도 낯설 것이다. 오랫동안 틀린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잘못된 성경 읽기도 마찬가지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인 줄 아는 이들이 많다. 욥의 친구 빌닷이 욥에게 한 이 말은 사업체에 액자로 걸어 놓을 만한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이 왜곡된 성경 이해를 바로잡는 건 쉽지 않다.  이미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낯선 것은 불편하다. 이미 익숙해진 내 언어와 세계관과 생활 패턴에 균열이 생긴다. 하여, 우리는 낯선 것을 거절한다. 그 낯섦이 내 삶에 끼어드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다. 말하던 대로 말하고,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고, 살던 대로 살고 싶다. 익숙한 사람끼리 모여 익숙한 대화를 즐긴다. 낯선 이의 방문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아브라함은 익숙한 자기 집 앞에서 낯선 나그네들을 만난다. 그리고 집으로 모셔 최선을 다해 환대한다. 성경은 그들이 하나님과 천사들이었다고 하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대접했다(히13:2). 드라마의 장소가 소돔 성으로 옮겨진다. 시간은 정오에서 밤으로, 분위기는 환대의 따뜻함에서 적대의 냉랭함으로. 소돔인들은 그 도시에 찾아온 낯선 나그네들을 끌어내어 집단 겁탈하려 한다.

김현경은 그의 책 <사람, 장소, 환대>에서 ‘환대’를 이렇게 정의한다.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낯선 나그네들에게 자리를 내어준 아브라함의 행위는 환대의 분명한 예시였다. 그렇다면 소돔인들의 행위는? 냉대, 홀대, 박대, 학대, 적대.

백인 우월자들이 아시안들을 향해 “Go back to your country!”라고 소리지를 때, 그들은 이 땅에서의 우리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예배 시간에 특이한 행동을 하는 자폐범주성 장애인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볼 때, 교회는 그와 그 가족을 위한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우환에서 있다가 정부가 전세기로 데려온 교민들을 막아서는 어느 시민들 역시 그 도시의 자리 한 평 내어주지 않는다. 환대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환대는 그저 하나의 덕목이 아니다. 구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예수께서 낯선 존재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그 낯선 이를 사람들은 어떻게 대했는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요1:10-11). 냉대하고 적대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환대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낯선 존재인 그분에게 내 삶의 왕좌를 내어주는 자에게 하늘의 자리가 주어진다. 하나님 나라에 낯선 존재였던 내게 아버지 집을 내어주시고 천사들의 환대를 받게 하신다. 구원이다. 환대의 행위 속에 복음의 본질이 다 담겨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