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3.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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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회 최순봉회장

최순봉

 

그날! 기미년 3월1일 잔인했던 역사의 뒤안길에서 삶의 아픔을 추슬러 온 햇수가 아흔일곱 돌, 아직도 우리들에게는 일제의 상흔이 못다 가셨다. 국토는 분단되었고 수역과 도서는 자국의 영토로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으며, 계산할 수 없는 음성적인 피해는 천문학적 숫자다. 도굴 된 문화재나 밀반출된 문화재는 차치 하더라도 일정시대에 강매된 국채 증서 중 소실된 것들은 산술할 근거가 없어지고 말았다. 내 나이 오륙 세 때 일이지만 패망한 나라의 채권이라 하여 관리를 소홀히 하기도 했지만 철없는 형들은 딱지를 접어 딱지치기로 버려지는 형상을 목격한지가 육십 여년 전일이다. 그처럼 소실된 채권이나 증권이 우리 집 우리 마을에서만 발생하지 않았을 터이니 어찌 그 피해액을 모두 산술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역사를 짊어진 우리들은 이날 하루만이라도 일본 공관 앞에서 그들의 만행을 되새김해주고 우리가 그날 그때의 만행을 잊지 않고 살고 있음을 보여 줘야 할 것 같다. 이는 한국의 외교정책과 상관없이 한국의 치외 법권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때의 역사를 공유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세계 평화의 초석이 될 수 있도록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고 그 때의 잔인성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 주어야하는 그 사명의 감당이다.

이러한 과거를 되새김하다 문득 하느님께 감사하여 눈시울이 적셔질 때가 많다. 그 감사는 남을 징벌할 능력을 나에게 허락하시지 않으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가 첫째다. 만약 나처럼 옹졸한 사람에게 미운 짓을 한다고 징벌할 능력이 주어 졌다면, 총알이 아깝다하여 동학 난에 가담했던 우리 조상들을 붙잡아 나무에 밀짚을 싸서 묶어 놓고, 들기름을 붓고 불을 붙여 산 사람을 태워 죽인 그들의 후손들을 어찌 그냥 두었겠는가! 그렇다고 내가 그들을 징벌 할 수 없다고 용서한 것은 더욱 아니며 그들의 만행을 잊어버린 것은 더 더욱 아니다.

오늘도 우리는 조국 독립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된 그날을 기리며 그 날 낭독한 독립선언문을 누군가가 다시 낭독할 것이며, 민족의 만세를 염원할 것이다. 아직도 우리에게는 부국강녕을 염원하는 만세가,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만세가, 동포사회의 화합을 위한 만세의 염원이 꼬리를 물고 있다.

이러한 염원으로 시작되는 기념행사는 상투적인 국민의례가 끝나면 대통령의 3.1절 기념사 대독에서 출발 될 것이지만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현지 동포사회에서 지도자들은 기도라는 구호에 그치지 말고 해야 할 일은 솔선하여 행동하며 불의에 대한 침묵에서 깨어나야 하며, 침묵하는 자신을 합리화로 위선하며 세상 공멸의 길로 갈 것이 아니라 살신의 도를 갈구하여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할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후진을 육성하는 의미에서 물러 설 때를 아는 것도 헌신이요, 불가에서 말하는 보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용어에 분별력도 길러야 개인과 집단의 품격이 신장될 것 같다.

어떤 목사가 회중을 대표해서 기도를 할 때 흔히 “기도, 하시겠습니다”라고 하는 소리를 듣는데 이는 자신을 높이는 존칭으로 바른말 사용은 아니라 본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혹은 기도 올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어떤 행사에 순서를 보면 축사나 기념사가 있고 격려사가 있는데, 축사나 기념사는 행사 주최를 기념하거나 축하는 말이고, 격려사는 주관 단체나 보조자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는 것이다. 만약 3.1절 격려사를 한다면 누구를 격려한다는 말인지 말의 의미가 바로 이해 되지 않는다. 이는 주관 단체의 품격을 저하시키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특히 3.1절처럼 그 정신을 기념하고 계승하여 그와 같은 비극의 전철을 다시 밟지 않으려는 목적이 갈무리된 행사장에서 격려사란 누가 감히 누구를 격려할 자격이 있다는 것인지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현장에서 숨 쉬고 있는 우리들은 좀 더 깊이 한 번 더 숙고하는 생활 습성이 자신과 그리고 함께하는 집단의 격위를 승격시키는 수단이 될 것으로 확신 한다. 우리가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진 못하지만 최소한의 배려는 꼭 필요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