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터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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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희(인디애나 음대 반주과 객원교수)

연주회장에서 피아니스트 옆에 앉아서 악보를 넘기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독주회에서는 주로 악보를 외워서 연주하지만, 성악가나 기악 연주자의 반주를 할 때나 여럿이 챔버 뮤직을 연주할 때에는 악보를 보면서 연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연주자가 연주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을 페이지 터너라고 한다. 대개 피아니스트들이 페이지 터너가 필요한 경우가 많다. 악보를 넘긴다는 뜻에서 한국에서는 애칭으로 넘순이나 넘돌이로 불리기도 한다. 페이지 터너는 연주자와 부딪히지 않도록 연주자의 왼쪽 뒤편에 떨어져서 않고, 왼손으로 악보의 오른쪽 윗부분 모서리를 잡고 악보를 넘겨야 한다. 주인공이 아니다 보니 연주자들이 무대로 나가고 난 뒤 조심스럽게 뒤따라 가서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악보를 넘기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연주자의 악보를 넘겨 줄 때는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혹시라도 악보를 제 때에 넘기지 못하거나 두 장씩 넘겨서 연주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부담이 큰 것이 사실이다. 페이지 터너는 곡을 이해하고, 연주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아야 하며, 악보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넘길 줄 알아야 한다. 연주가 많은 반주자들에게는 좋은 페이지 터너를 구하는 일도 쉽지 않다. 대부분 피아노 전공 학생들에게 부탁하는데, 때로는 다른 악기나 성악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기도 한다. 피아노 전공자가 아닌 다른 학생들은 피아노 악보가 눈에 익숙하지 않다 보니 넘겨야 하는 타이밍을 놓칠 때가 많다. 오른손으로 악보를 가리면서 넘겨서 연주에 방해가 되기도 하고, 손이 건조해서 한 장이 아닌 여러 장의 악보를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악보를 넘기다가 잘 못 건드려 악보가 피아노 건반이나 바닥으로 떨어지는 아찔한 경우도 있다. 이렇다 보니 악보를 넘겨 달라고 부탁하는 입장도 그렇고, 부탁을 받는 입장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술과 과학의 발달로 이제는 종이 악보가 아닌 태블릿을 이용하여 악보를 보는 연주자들이 아주 많아졌다. 태블릿을 이용함으로써 악보를 넘기는 수고로움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는데, 페달을 이용하여 악보를 넘기는 것이다. 태블릿과 페달은 블루투스로 연결되어 있고, 연주자가 악보를 넘겨야 하는 시점에 페달을 밟으면 자동으로 악보가 넘어가게 되어있다. 페달은 피아노 페달 왼쪽에 두고 쓰는데, 피아노 페달도 밟아야 하기 때문에 헷갈리기도 한다. 익숙하게 사용하기까지 짧게는 몇 일에서 길게는 몇 주가 걸리기도 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은데 악보 페달을 살짝 밟는 다는 것이 너무 세게 꾹 밟아서 악보가 여러 장 넘어 가기도 하고, 연주에 심취해 있다가 발을 크게 움직여 페달을 차 버리게 돼서 페달이 발이 닿지 않는 곳에 있어서 못 넘기게 되는 웃픈 일들도 있다. 요즘에는 더 나아가 연주자의 동작을 태블릿이 읽음으로써,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이면 악보가 앞으로 넘어가고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면 악보가 뒤로 넘어가도록 하는 앱도 개발되어 있다. 하지만 연주를 하면서 몸을 움직이게 되면 태블릿이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있어 이 방법은 많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태블릿을 사용함으로써 페이지 터너 없이도 악보를 쉽게 넘길 수는 있지만, 기계가 오작동하는 경우가 있어서 연주 때에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종이 악보도 함께 챙기는 경우가 많다. 한시간 이상의 연주로 배터리가 부족하거나 갑자기 화면이 정지되기도 한다. 아무리 기계가 편리하다고 하더라고 사람이 직접 악보를 넘기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페이지 터너는 무대 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연주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