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27. 벤자민 B. 윔스(Benjamin B. We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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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벤자민 윔스 가문은 아버지로 부터 자녀 세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선교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아버지 클라렌스 윔스와 어머니 낸시 윔스 선교사 부부는 1909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파송 받아 31년 동안 개성과 원산에서 선교사로 사역했다. 원산 중심으로 농촌교회 선교 사역은 사역자들을 양성하고 소학교를 직접 운영하여 무지에서 탈피 시키며 민족의 지도를 세우기 위하여 유능한 학생을 선발해 미국에 유학을 보내는 큰 공헌을 하게 된다. 교회가 없는 곳에 40여 교회를 건축하고 교계 연합 활동에도 힘썼다. 남 감리교 조선연맹 대표자가 되었을 때에 남, 북 감리교를 통합하는 큰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출생했던 첫째 데이비드, 둘째 클라렌스, 한국에서 출생한 세째 벤자민 B. 윔스, 넷째 빌, 자녀들은 훗날 선교사로, 미군정청 고문, 주한 미국 대사관 담당자관등 한국에  관련하여 많은 활동을 했다. 특히 3남 벤자민 B. 윔스는 1914년 선교사 자녀로 개성에서 출생하여 한국에서 중등과정을 마치고 미국 듀크 대학에서 졸업을 한 후에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아버지 대를 이어 고향처럼 느껴지는 한국에 와서 서울 외국인학교 교장으로 재직을 하게 된다.

일제시대에 강제로 추방을 받아 1940년 잠시 미국에 귀국하여 룻 코브렌츠 윔스와 결혼하여 해방후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특히 아내 룻 윔스는 결혼전 오버린 대학을 졸업후에 처녀의 몸으로 서울 외국인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교사로 봉사 하다가 남편 벤자민 윔스를 만나, 미국에서 결혼을 하게 된다. 안따깝게도 룻 윔스는 한국에 돌아와서 남편의 동역자 삶을 살면서 암으로 2년동안 투병 생활 하다가 셋딸을 남긴 채 세브란스 병원에서 소천하게 되었다.

벤자민 윔스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큰 가교 역할을 하게된다. 그의 활동은 미소 공동위원회이나 미국 정보국의 대외 방송이었던 “미국의 소리”에서 한국 국장 대리로 재직하였으며 그후에 UN군 사령부에서 지역 협력관과 미국 평화 봉사단 책임자로 일하게 된다. 윔스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에  특별한 애정을 가졌기에” 미국의 소리” 한국부로  지원하였다. 특히 서재필 박사와 신뢰와 친분을 갖고 도움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서재필 박사는 윔스에 대하여 한국 사람들의 좋은 친구라고  소개 하기도 했다. 윔스는 한국을 너무 사랑하며 은퇴후에도 한국 정신 문화 연구원에서 교수로 지속적으로 한국학을 연구하다가 1986년 1월 31일 소천하게 되었다.(참고: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양화진 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