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0] 윌리암 M. 베어드(William M Baird/배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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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베어드는 한국 선교역사에 큰 자산이다. 그는 조선인의 문명 개화를 위해 헌신하며 큰 공헌을 이루웠지만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베어드는 어린 시절 어머니 낸시로부터 엄격한 개혁교회 전통의 신앙으로 양육을 받았고 그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하면서 선교에 대한 꿈을 품게 되었다. 1888년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후, 그해 5월 뉴알바니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베어드는 대학시절 선교의 꿈을 함께 가졌던 애니 베어드와 결혼을 하고 1891년 미국 북장로교회 소속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부산에서 첫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베어드가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된 것은 맥코믹 신학교의 영향이 컸다. 맥코믹 신학교는 목회자와 선교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되어 종교개혁적 복음주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교회정치 원리에 기반한 신학교육을 실시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베어드는 자연스럽게 선교사로 결단할 수 있었다. 선교사로 결단 할수 있도록 동기와 큰 영향은 맥코믹 신학교 동기생 마포삼열(1889년)의 권유였다. 맥코믹 졸업생으로 먼저 내한한 기포드(1888년)와 마포 삼열은 한국으로 선교사 추가 파송이 가능 하면서  베어드를 선교본부에 추천하여 파송받도록 했다.

베어드는 특히 기독교교육 분야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이룬 선교사중에 선교사이다. 그의 사역을 보면 선교 초기는 부산과 대구 선교지부와 한강 이남의 중심으로 사역 했으며 최초 교회인 초량 교회를 설립하고 한반도 남부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초기 주된 관심도가 부산지역 어린이 대상으로 학교사역이다. 학생들 늘어나면서 여자들을 위한 야간학교를 개설했다. 중반기에는 조선 선교부의 교육정책인 우리의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1897년 평양에 숭실학당을 세웠으며 1906년 감리교와 연합해 한국 최초의 근대 대학인 숭실대학을 설립했다. 1908년에는 대한제국 정부 아래에서 조선 최초의 4년제 대학, 합성 숭실대학으로 인가 되어그해에 대학부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숭실대학은 목사, 독립 운동가,등 다양한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민족 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였다.

베어드의 교육정책은 교육기관을 선교현장으로 이끌었다. 그외 한국교회 대 부흥에도 기여 하였다.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 운동이 장대현교회에서 시작하고 2월에 부흥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 하였다. 기폭제가 된것이 평양 숭실학교 개강 수련회와 그 중심에 교장 베어드와 그의 동료 베커 선교사가 있었다. 선교 후반기는 숭실대학 학장을 사임하고 평양에서 세상을 떠날때까지 남은 인생을 주일학교 공과교재 번역 및 출판, 성경번역, 기독교 문서 번역 다양한 문서선교에 힘을 쏟았다. 베어드의 글은 자신이 편집인으로 있었던 신학지남에 기고 하였다. 1911년에 구성된 구약 개역자회에 개역위원으로 성경개역 작업에도 깊이 관여 하였다. 1930년에는 17권의 구약성경 개역본이 완성되었다.

40년간 한국선교 사역에 전념 하다가 1931년 11월28일 향년 69세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되었지만 많은 동료들이 평가 하기를 그의 성품은 조용하고 내향적이며 규칙적있고 학적으로 준비가 되었으며 신중하고 보수적인 기질로 한국 선교에 적격한자라고 했다. 베어드는 복음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어서 1년중 7개월을 순회 전도를 하기도 했으며 1896년에는 8차례에 걸쳐 총279일간 약1천마일을 전도 여행을 하는 헌신적인 사람이었음을 알수있다. 오직 한국 백성들을 사랑하여 한 사람이라도 구원 하고자 하는 복음 열정을 배워야 할것이다.(참고문헌: 베어드와 한국선교, 한국 개신교사, 배위량의 박사의 한국선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