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39] 셔우드 홀(Sherwood H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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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셔우드 홀(Sherwood Hall)선교사는 의료 사역을 했던 부모(제임스 홀과 로제타 셔우드 홀)의 선한 영향을 받고 성장했다. 그는 어렸을 때 사랑하던 아버지 제임스 홀과 여동생 에디스, 그리고 자신을 늘 돌보던 박 에스라가 풍토병으로 인한 죽음이셔우드 홀 자신에게는 의사가 되는 길로 결심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1919년에 미국 유니온 대학, 토론토 대학교에서 의과 대학을 졸업후 뉴욕 결핵 요양소에서 결핵을 연구하다가 미국 감리회 의료 선교사로 1926년 4월19일에 한국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그는 미국에 돌아가서 사업가 되는 꿈을 가졌지만 닥터하디의 설교를 통해 의료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이루게 된것이다.

한국으로 파송받은 그는 황해도 해주 구세병원 원장으로 사역을 하고 1928년 10월27일 황해도 해주에 처음으로 결핵 전문 요양병원인 구세 요양원을 설립하게 되었다. 요양소를 세운 뒤 ‘결핵 환자의 위생학교’라고 명명했다. 결핵 요양소의 운영비를 마련하고 결핵에 대한 계몽과 선전을 하기 위해 남대문을 그린 크리스마스 씰을 1932년 12월 3일 발행했다. 크리스마스씰은 1904년 덴마크에서 최초로 발행되었다. 코펜하겐의 우체국장이었던 ‘아이날홀뵐(EnarHolbell)이 크리스마스 시즌에 결핵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모금 방법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덴마크 국왕인 크리스찬 9세의 적극적인 협조로 12월 10일 첫 번째 씰이 발행되었고 이 방법은 곧이어 전 유럽과 미국으로 확산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도 소개되었다.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은 셔우드 홀(Sherwood Hall)에 의해 발행되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한국 거주하는 외국 선교사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가 강화되고 많은 외국인이 체포되어 강제로 추방당하는 시기였다. 셔우드 홀은 화진포 별장에서 영국 신부 캐럴을 만나고 동해안 지역 사진을 촬영했다는 혐의로 간첩의 누명을 쓰고 벌금 1,000달러의 판결을 받아 강제로 추방을 당했다. 그 이후로 씰의 판매도 중단되었다가 이후 해방을 거쳐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3년 11월 6일에 대한결핵협회가 정식으로 창립되면서 씰 제작과 판매가 다시 이루어졌다. 그는 19441년 한국을 떠난 후에도 인도에 변방지역 마르다 연합 결핵 요양원에서 결핵 퇴치 사업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이후 캐나다로 돌아가 1991년 4월5일 98세로 별세하였다.그가 한국을 떠날 때 남긴 글을 요약해본다.

“조선을 떠나기는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머문다면 우리는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 조선 친구들에게 더 큰 시련이 닥칠 것임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출발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상념에서 깨어나 아이들을 불렀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아름답게 수놓은 조선 국기를 꺼냈다. 해주에서의 환송연 때 조선친구들이 기념품으로 우리에게 준 것이다. 나는 태극기를 펼친 다음 나뭇가지에 걸었다. 우리 가족은 태극기 주위에 모여섰다. 우리 가족 다섯중 네명은 조선에서 태어났다. 매리안도 생애의 전성기를 조선에 바쳤다. 우리 가족은 목소리를 높여 만세!를 외쳤다.”

셔우드 홀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 추방당할 때까지 결핵퇴치를 위해 결핵 요양병원 설립, 크리스마스씰발행, 결핵 환자들을 위한 모범농장개설 등 사회에서 격리 당하는 자들에게 희망과 좋은 친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참고문헌: 작터홀의 조선회상, 한국역사를 빛낸 캐나다인들, 양화진의 선교사의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