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한 선교사 이야기 43] 제니 소피아 프릭(Jenny Sofia F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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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주님은 그리스도인에게 복음과 뗄수없는 사명을 주셨다. 얼마든지 자신이 살고 있는 가까운곳에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수 있지만 온 세계에 죽어가는 영혼을 보게 하시어 자신의 나라와 가족을 뒤로하고 미지의 세계에서 그 나라 문화와 언어로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셨다. 백년전에 복음이 필요로하는 한국에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다. 그 중에 구세군 최초의 여사관 제니 소피아 프릭(Jenny Sofia Frick)이다. 그녀는 1911년 12월24일에 4명의 독신 여사관들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서울에 도착 하였다. 제니 소피아 프릭은 1886년 8월16일 스웨덴 텔레북에서 출생 하였고 구세군 추렐러버 영문의 병사로 헌신하여 구세관 사관학교에 입학 및 졸업하여 구세관 참위로 임관 되었다.

당시 선교지를 한국에 소개했던 구세군 뷔버 지방장관의 말에 의하면 “ 프릭 사관은 기쁨이 가득하고 성령의 감화를 받은 여성으로 어디를 가든지 주를 위하여 선한 사업을 크게 일으킬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각 사람마다 주신 하나님의 사명은 다르지만 사명은 등대지기가 되어 불을 밝히는 것과 같다. 어둠이 덮인 넓은 바다에 배 한척이 항해를 하려면 등대의 불빛을 보고 안전하게 항해를 하듯이 인생의 나침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를 전해주는 사명자가 필요하다.

만약에 등대지기가 불을 밝히는 사명을 감당치 못한다면 항해하는 배는 침몰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잃게 될것이다. 등대지기가 불 밝히는 사명을 감당할 때 존재 의미가 있다. 프릭은 작은 밀알이 되어 복음의 불을 밝히다가 한국에 내한한지 일년도 안되어 급성 뇌염으로 안따깝게도  순직하게 되었다. 구세군 선교사로 한국에서 순직한 첫 여사관이 되었다. 1912년 4월18일 그녀의 죽음은 구세신문 추도서에 그의 삶을 기록해 놓았다.

“매일아침 6시에 일어나면 한시간동안 기도와 성경 공부로 하루 일과를 시작 하였고 자주 이른 아침 높은산에 올라가 서울 성중을 내려다 보며 한국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아무쪼록 한국 사람을 구원하여 주의빛을 보도록 하려는 생각이 간절 하였다. 그러나 한국 말을 능하게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세군 신문과 마가복음을 구입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기도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사람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사관학생 김병도는 프릭 여사관에 대하여 언급 하기를 “그녀는 언어도 혼잡하고 풍속도 서투르나 인정이 많으며 자기 육신을 한국에서 바치기로 결정하고 한국말과 학문을 열심히 공부하여 수개월이 못되어 성경을 겨우 볼 만하며 쉬운 말을 능히 통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릭 여사관은 비록 한국에 4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이지만 그녀의 고백은 “비록 외국 여자이나 이 나라 이민족을 위하여 내 몸이 다하도록 주의 일을 종사 하겠다”는 삶을 행동으로 보이며 묘비에 기록 된것처럼 복음의 열매를 위해 한알의 밀알이 되었다.(참고: 양화진의 선교사의 삶, 구세신문 1962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