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사랑 선교사 이야기 38] 윌리암 존. 리처드(William J. Richards, 이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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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문 목사(시카고나눔교회 담임)

윌리암 J. 리처드는(William J. Richards)1878년 영국 런던에서 구세군 사관  윌리엄 존 리처드 부장의 7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열살에 구세군에 감동 되었고 열두살 때 구세군의 어머니로 불리는 캐더린의 묘 앞에서 자기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자 헌신을 다짐했다. 18세때 청년으로 런던 국제 본영에서 일하게 되고 사관학교를 졸업하여 덴마아크에서 7년간 선교 사관에서 사역을 하게 된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서 국제 본영에 임명받아 구세군 창립자 윌리암 부스의 보좌관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는 1909년 2월8일, 32살에 메리킬로(Richards, Mary K.) 부관과 결혼을 하고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청년부 기관, 지방 장관을 역임하고 세자녀와 함께 1918년 6월2일에 한국에 구세관 서기장관으로 임명받아 내한하게 된다. 한국의 첫 인상과 예배의 모습을 그의 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내가 아버지와 어머니, 두 동생과 함께 서울에 온 것은 1918년 6월 이었다. 인도네시아에서 종려나무와, 바나나 나무만 보다가 한국에서 소나무를 처음 보니 아주 신기했다. 눈도 많이 와서 겨울에는 난로를 피웠다.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할 때는 반드시 성경책을 색 보자기에 소중히 싸가지고 왔다. 그리고 책보를 풀어 성경책과 찬송가를 꺼낸 뒤에는 그 책보를 착착 개어서 앞에 놓았다가 다시 싸가지고 가곤했다. 마루 바닥에 앉아 ‘찬송 합시다’라는 찬송을 부를 때에 어떤 할머니는 남이 다 부른 후에도 그치지 아니하고 계속하여 길게 여음을 끄는 것이 신기했다.” 당시 우리 민족에 복음의 실상을 보여준다. 천민들과 소수의 가난한자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리처드는 41세로 투철한 구세군 정신과 인류를 위해 헌신된 삶을 통하여 영문(교회)성장의 기틀을 마련 하였고 사관 부인들과 전도 부인들을 훈련하여 전도에 힘섰다. 그의 부인 메리 킬로는 매주 특별집회를 인도하며 여성교육에 앞장섰다. 리처드 부령은 1918년 10월에 구세군 한국선교 10주년 총회를 준비를 위하여 특별 성별회를 인도하며 총회를 통하여 한국인 사관들이 헌신하는 기회를 가졌다. 한영혼 구원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했으며 걸인들을 계속 돌보며 지원하는 사회사업에 힘썼다.

리처드 사관의 딸 기록에 의하면 “나는 아버지가 밤중에 초롱불을 들고 나가 거지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가끔 보았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구세군 사관 학교로 데려가 목욕을 시키고 머리를 깍아 주고 새 옷을 갈아 입혔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아이가 천연두를 묻혀 와서 온 사관 학교에 퍼지게 되었다.”

거리에서 걸인 아이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이미 천연두에 감염 되었던 아이들을 고아원에 수용하므로 천연두가 확산게 되어 여러명이 희생을 당했다. 동료 선교사 자녀들이 사망 하였으며 리처드 사관 역시 천연두로 인하여 한국땅을 밟은지 2년만에 유복자를 남기고 별세하게 되었다.  리처드 부인도 폐렴에 매우 약해진 상태속에서 장례식과 하관식에 참여 하지를 못했다. 브람웰 부스 대장은 리처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리처드 부령은 강직하고 열렬한 구세군에 좋은 표본 이었다. 진정으로 헌신하여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어디든지 나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구원은 봉사, 순종,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리처드가 남긴 어록을 보면  “나의 가장 큰 기쁨과 열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의 나라에 영혼을 구원시키는 것이다.”

지금도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전세계로 확산 되어가는 팬데믹 속에서 순교를 당한 선교사와 그 가정을 진심으로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참고문헌: 한국 구세군 100년사, 내한 선교사 총람, 양화진 선교사 삶, 양화진 외인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