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 문화산책] 처용가(處容歌) 뒤집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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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웅(문학평론가/시카고)

 

신라 향가(鄕歌) ‘처용가’는, 동해 용왕(龍王)의 아들인 처용(處容)이 A.D. 879년경 신라 헌강왕의 눈에 들어 ‘급간’이라는 벼슬과 미모의 아내도 얻어 나라 일(國事)도 돌보며, 동경 밝은 달밤에 밤드리(늦도록) 노닐다 집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어가 보니 “가라리 네히어라. 둘은 내해엇고 둘은 뉘해인고? 본대 내해다마는 앗아날(빼앗겼으니)  어찌하릿고!” 처용은 불륜 현장을 덮치지를 아니하고, 그냥 밖으로 나와 달밤에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고 전해진다. 아내를 범한 외간 남자는 처용 아내의 미모에 반한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疫神)이었는데, 조용히 물러난 처용의 행동에 감동 자복하여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앞으로 처용의 형상(얼굴)을 문에 붙여 놓으면 역병을 옮기지 않겠다고 전해지면서 사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축사(逐邪, exorcism)의 궁중 가면무(假面舞)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오방색(五方色)의 무용수와 춤사위가 현란하고 활기차게 발전 전승되어 결국 2009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무형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됐다.

삼국유사(三國遺事) 처용 설화(說話)에는, 신라의 헌강왕이 지금의 울산 지역인 개운포에 신하들을 데리고 놀러나갔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짙게 끼고 날씨가 험악하게 돌변하여 어둡고 당황하던 중에 동해 용왕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나타났고, 그중 똘똘하게 보이는 처용이 헌강왕의 맘에 들어 벼슬자리를 얻게 됐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사실은 신라 시대만 하더라도 비단길(Silk Road) 육로와 해상으로 서역과의 교역이 빈번 활발했던 만큼 처용과 용왕의 아들들이란 아마도 난파(難破)당해 구조된 가무잡잡한 이방인 몰골의 이슬람 무역 상인들이 아니었을 가 싶다. 또한 아내의 불륜의 현장을 목격하고도 조용히 밖으로 나와 달밤에 어쩔거냐고 자조적인 노래를 부르며 춤을 췄다는 처용의 행위를,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 박사는 “관용적인 대범한 신라 정신”이라고 학부 시절 문학 강론 시간에 논평을 했지만 나로서는 당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나의 처용가에 대한 풀이는, 처용이 자기 침실에서 잠자리에 보았다는 4개의 사람 다리는, 실은 자기 아내와 자신의 다리로, 자신의 존재를 초극(超克), 이탈(離脫)하여 객관적인 시각으로 자신의 적나라한 실존(實存)을 감지, 인식했을 때 발현(發顯)되는 존재의 쾌감(快感)으로 본다면 비로소 달밤에 춤을 췄다는 처용의 행위가 쉽게 이해가 된다. 예로부터 가무(歌舞, 춤과 노래)를 즐겼다는 우리 조상들의 초월적 예지(叡智)가 새삼 놀랍게 느껴진다. 지구촌 문화 풍토에 한류가 휩쓸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가 갖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또한 무애(无涯) 양주동 교수는, 처용가를 해석하면서 첫 행의 “새발 발기 다래”(서라벌 밝은 달에)에서 서라벌-새발-서울(capital)이라는 단어를 도출(挑出)해 냈음을 참고로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