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 문화산책] 토니 군과 나빈 녀석

200

명계웅(문학평론가/시카고)

이 친구들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半世紀) 전, 내가 미국에 처음으로 혼자 유학 와서 자취생활을 하던 Georgia주(州) Atlanta시절에 대학 근처의 아파트에서 나와 함께 지냈던 룸메이트들이다. 하기야 경제학 전공이던 희멀끔한 그리스 태생 키훌쭉이 노총각 토니 군에 비하면, 인도에서 건너 온 물리학도인 나빈 녀석은 땅딸막한 몸집에 피부 색깔마저 까무칙칙한 편이기는 하였지만, 하찮은 피부 색깔을 가지고서 내가 인종차별을 하려는 의도에서 무슨 ‘군’이니 ‘녀석’이니 하는 호칭을 그네들 이름자에 골라 붙인 것은 아니다.

난생 처음으로 미국 땅에서 외국 친구들과 각기 반 년 남짓이 숙식을 함께 하다 보니, 어쩐지 이런 식으로 그네들을 부르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맨 처음 풍긴 인상에서나 지금까지 어렴풋이 남겨준 기억에 걸맞다 싶어서인데, 굳이 이러한 느낌마저 무의식적인 내 편견의 소치 내지는 잠재의식의 발로라고 할 것 같으면 나야말로 정녕 몹쓸 ‘놈’이란 비난을 들어 마땅하렸다.

늦게 미국에 도착이 되어 학교 기숙사는 이미 만원이었던 형편이라 서둘러 개인 하숙방이라도 구해 볼 요량으로 두리번거리던 중에 학생관의 게시판에서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쪽지 광고를 보고서 연락이 닿게 되었던 것이 바로 나빈 녀석을 내가 처음 알게 된 동기였다. 드디어 내가 짐 보따리를 들고서 녀석의 방문을 두드렸을 때, 녀석의 눈엔 미국에 갓 들어온 꾀죄죄한 오 척 단구의 내 몰골이 필시 누런 촌닭처럼 비쳤던 듯싶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코리아라고 할 것 같으면 고작 ‘한국동란’이나 ‘군사 쿠데타’를 얼른 떠올릴 정도로 우리의 국제적인 위치가 초라했던 시절이긴 하였다. 한 달분 방세를 거머쥐기가 무섭게 녀석은 나를 욕실로 끌고 가서는 수세식 변기와 샤워를 어떻게 써야 된다는, 소위 토일렛 트레이닝부터 시켜주고 나서는, 이어서 텔레비죤과 전축 켜는 법하며, 전화와 가스레인지, 디쉬워셔, 냉장고 사용법하며, 센트럴 히팅 조작법 등등을 장황스럽게 일러주고 나서는 마지막으로 거실과 욕실과 부엌은 공동 영역이나 각자의 침실은 불가침의 성역으로 프라이버시는 최대한도로 존중돼야 될 것이며, 친구가 왔을 경우에는 상대방은 공동의 지역에서는 되도록 얼씬거리지 말고 자기 침실에 틀어박혀 있어야 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나서는, 매우 득의만면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이러한 오죽잖은 오리엔테이션에 대하여 문학전공인 나로서는 타골의 ‘기탄자리’에 대한 화제를 슬며시 끄집어내어 녀석을 교양적인 궁지에 몰아넣음으로써 결국 토일렛 트레이닝에 대한 설욕만은 그 즉시로 치를 수가 있었지만, 친구가 오면 거실을 양보해야 된다면서 프라이버시 운운한 녀석의 저의(底意)를 알아차리기는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학교생활에서 주말에 틈이 좀 생기고 터덜거리는 정크 차라도 운 좋게 한 대 끌고 다닐 처지가 될라치면, 그리하여 여자 친구를 데리고서 값싼 패스트 후드에서 저녁을 때운 다음 곧바로 드라이브 인 디어터로 차를 몰고 들어가 열띤 화면을 보면서 군중 속에서의 엉큼한 밀회도 즐길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더할 나위 없는 터리휙 위킨드로 간주되던 70년대의 대학 시절에, 고물 자동차는 커녕 떠듬거리는 영어에 모든 것이 전혀 낯설기만 했던 나로서는 주말에 방구석에 진종일 죽치고 앉아서 텔레비전과 씨름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거니와, 문제는 나빈 녀석이었다. 여자 친구들을 주말마다 불러들여서는 공동 지역인 리빙룸을 떠억 차지하고서는 이슥 맞도록 왁자하니 소란을 피우다가는 마침내 사리를 입혀본다고 시시덕거리다가는 침실로 직행하는 것이 녀석의 상투적인 수법이었는데, 주말마다 이런 수작이 거듭되다보니, 나에게는 여간한 정신적 부담감과 불편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녀석의 말로는 인도인들이 상식하는 커리같은 스파이시한 양념들이 스테미너를 돋우어준다고 변명 비슷한 말을 흘리기는 했지만, 방세를  똑같이 양분해서 내는 처지에 나 혼자서만 주말마다 침실에 유배되다시피 하여 정신적 불편과 피해를 마냥 당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에서 드디어 하숙방을 다시 옮기게 되었던 것이 내가 토니 군을 두 번째의 룸메이트로 삼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나 보다 키가 한두 뼘은 더 큰 키다리였지만 나이는 한두 살 아래였기 때문에 나에게 깍듯이 손위 대접을 하려 했던 토니 군은, 어딘가 음침하고 시건방진 나빈 녀석에 비하면 우선 첫 인상부터가 해맑고 좋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솔직하고 분명했다. 더구나 희랍 신화와 문학에 대해서도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좋은 대화의 상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아는 것이 많았다. 농담도 곧잘 하던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옛날에 한반도를 원정했기 때문에 ‘네, 예(yes)’란  말이 발음이나 뜻이 서로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지마는 나는 칭기즈칸이 아테네를 점령했기 때문이라고 되받아 넘겼던 일이 엊그제만 같다.

토니가 적을 둔 학과에서 비서로 근무하던 다이앤이란 장신의 금발 아가씨와 열애 중이던 그는 주말이면 (거처를 옮기면서 마련했던) 내 고물 자동차를 빌려 타고서는 곧잘 드라이브 인 디어터로 가는 눈치였지만, 내 차를 쓰고 난 다음날이면 으레 가솔린을 다시 채워 넣거나 자동차 안팎을 말끔히 손수 씻어놓음으로써 조그만 치라도 내게 폐를 끼치려들지를 않았다.

얼마 후에 나의 가족들이 미국에 들어옴으로써 내 하숙생활도 끝장이 나게 되었지만 내가 나중에 얼핏 들은 소식인즉슨 이러하다. 나빈 녀석은 컴퓨터 계통으로 직업을 얻게 되자, 곧바로 영주권을 신청하여 가족을 초청함과 동시에 학업을 중단하였고, 토니 군은 나와 헤어진 다음 해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는 말까지는 들었는데, 다이앤과 결혼했는지의 여부는 끝내 확인할 기회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