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 문화산책] ‘핀란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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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웅(문학평론가/시카고)

58,000톤 급 초호화 유람선 ‘Silja Line’을 타고서 스톡홀름을 떠나 밤새껏 발트해(海)를 건너 헬싱키에 도착한 날 아침은 선선하고 쾌청한 날씨에 시가지도 비교적 깨끗하고 한적한 편이어서 전형적인 북 구라파 도시 분위기를 풍겨주고 있었다. 아침 식사는 이미 선상(船上)에서 끝낸 터라 곧바로 관광버스를 타고 헬싱키 명소인 “시벨리우스 공원”으로 향했다. 핀란드는 작곡가 Jean Sibelius(1865-1957)를 온 국민이 국부(國父)처럼 존경하고 아껴 도심 녹지대에 그의 이름을 붙인 공원이 조성되어있고, 넓은 숲 속 한 쪽에는 수백 개의 강철 파이프를 연결시킨(아마도 파이프 오르간을 상징하는 듯싶은) 거대한 조형물과 그 옆에는 시벨리우스의 철제 흉상(胸像)이 바위 위에 인상 깊게 세워져있어 관광객들이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시벨리우스를 기리는 이 현대식 기념비는 여류 조각가 Eila Hiltunen 작품으로 핀란드 전국에서 모금하여 1967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시벨리우스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핀란디아’(Finlandia, OP.26)는, 나의 대학시절인 1960년대 음악감상실에서 자주 듣게 되던, 귀에 익은 인기 신청 곡 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연주시간이 8분30초 정도 걸리는 교향시(Tone Poem)로서 그가 34세 되던 1899년에 작곡, 1900년에 다시 개작(改作)이 된 것으로, 곡의 중간부의 주제 선율은 가사를 붙여 합창곡으로 만들어져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웅장하고 활기 넘친 이 곡은 또한 1919년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하여 공화국으로 선포되었을 때 경축식전에서 연주되었고, 지금도 핀란드 국민들에게는 국가(國歌) 이상으로 열광적인 사랑을 받고있다.

시벨리우스는 생후 2년 8개월 때 군의관이었던 부친이 사망하자 외조모 집에 살면서 어릴 때 숙모한테 처음 피아노를 배웠고, 14세 때 숙부가 사다 준 바이올린을 배우게 되면서 장차 바이올린의 대가가 되는 것이 어린 시벨리우스의 꿈이었다고 한다. 그는 1885년 헬싱키 대학 법과에 입학했지만 일년도 채 안되어 음악으로 전공을 바꿔 뮤직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베를린과 비엔나로 유학을 떠나 비엔나에서는 브람스 문하에 들어가려 애썼지만 까다롭기로 소문나있던 브람스가 끝내 받아주지를 않아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민족적인 작품 활동이 모국에서 인정을 받아 ‘핀란디아’를 작곡하기 전인 1897년(32세)부터 이미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고 있었다. 그는 1892년부터 10년간 그가 다녔던 음악원에서 교수로 근무했는데, 이 학교는 후일에 ‘Sibelius Musical Academy’로 개명됐다. 베토벤 이후 최대의 교향곡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가장 핀란드 적인 음악가로 국보적 존재로 추앙 받던 시벨리우스는 심지어 그의 작곡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그의 생존시 헬싱키에서 북쪽으로 24 마일 거리에 있던 그의Ainola 저택(현재 시벨리우스 기념관) 상공엔 비행기의 비행도 금지되는 각별한 배려를 정부로부터 받았다. 시벨리우스는 64세 때인 1929년부터 92세로 1957년 뇌출혈로 사망할 때까지 28년 동안 작곡 활동을 일절 하지 않고, 라디오 안테나를 집에 높이 세워 놓고 서재 안락의자에 앉아 전 세계에서 연주하는 자기 작품을 단파 방송으로 들으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