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70 문화산책] 백양로(白楊路)를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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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계웅(문학평론가/시카고)

지난 주 일주일간의 짧은 한국방문 중 마침 김용학 연세대총장 공관에서의 만찬 초대가 겹쳐서 오래간만에 연세 캠퍼스를 방문하게 되었다. 미주지역 동문 너 댓 명이 윤동주 시인을 기리는 연세문학동산 조성기금마련을 위한 학교관계자들과의 모임이었다. 나는 일 년에 한두 차례 서울을 나가게 되는 터이지만, 모교를 가볼 기회는 없었는데 금번에 모처럼 교정(校庭)을 둘러보게 되었다. 새로 단장한 백양로(白楊路) 길을 걸으며 학창 시절의 추억이 어렴풋이 되살아났으며, 언더우드 동상이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해 주고 있었고, 4년간 정들었던 문과대학 건물은 대학본부 건물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리고 졸업식 행사를 치렀던 노천강단은 지원금을 낸 동문들의 이름이 좌석에 새겨지고 새롭게 축조(築造)되어 있었다.

많은 외국인 학생들과 더불어 연대생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는데, 학교 배지(badge)를 달고 다니던 60년대 세대와는 달리 배지를 단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궁금해서 지나가는 교수인 듯싶은 이에게 물어보니 위화감(違和感)을 주지 않으려고 요즘 학생들은 배지를 부착하지 않고, 대신에 학교 모자나 가방, 허리띠나 스카프를 걸치고 다닌다고 한다. 김 총장은 특히 대학에 재직했던 국문학의 김윤경 교수와 철학과의 정석해 교수등 유명한 교수들을 기리는 행사와 평균 수명(壽命)이 100세 가까이 연장되는 추세에 따라 졸업 후 재상봉 행사를 25년 50년으로 정해진 것을 60년을 추가한 덕분에 나는 2024년에 한 번 더 재상봉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모처럼 연희 숲 속에 자리 잡은 총장 공관에서 연세브랜드 레드와인을 마시며 푸짐한 만찬과 즐거운 대화와 친교를 나눌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행운(幸運)이었다.

또한 모국(母國)에 나갈 때마다 느끼는 인상은, 한국 사회가 매우 역동적(力動的)이고 활기찬 사회라는 점이다. 나는 서울 방문 시 언제나 시청(市廳) 앞 플라자호텔에 머무는데, 그 이유는 중요한 역사(歷史)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호텔 우편엔 1897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옮기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환구단(圜丘壇)이 있고 같은 경내(境內)에 있는 조선호텔은 일제강점기에 환구단을 헐어 없애버리기 위해 경성철도호텔을 세운 것이다. 고종은 알렌 (Horace Allen)선교사의 도움으로 1893년 콜롬버스가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해 세계 47개국이 참가한 시카고세계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에 정경원(鄭敬源)을 단장으로 10여명의 궁중 악공과 가마, 관복, 부채, 짚신, 자수 병풍 등 21종의 민속공예예술품을 출품하고, ‘대조선’이라는 국호로 한국관을 차리고 태극기를 내 건 후 5월부터 10월까지 활동을 벌였는데, 특히 우연히 한국관에 들른 클리브랜드 (Grover Cleveland) 미대통령 앞에서 국악을 연주한 것은 한류(Korean Wave)의 시초가 된다. 박람회 유치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렸던 뉴욕커들이 시카고 사람들을 허풍선이(windy)라고 비아냥거린 것이 결국 시카고 별명(別名) ‘Windy City’가 되었다.

플라자호텔 좌편엔 덕수궁과 러시아, 영국, 미국 공사관이 있고, 옛 국회의사당과 조선일보, 서울신문, 동아일보 건물과 청와대가 마주 보인다. 시청 앞 광장엔  빛고을(광주) 김치축제, 젓갈, 바다 소금축제, 어린이날축제, 합창 관현악 음악공연 등 연일(連日) 서울특별시 주체 행사가 진행되는데, 광화문 대로엔 주말마다 전국에서 올라온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태극애국대원들의 가두시위(街頭示威)가 요란스레 벌어지고, 경찰들은 시위대를 위해 도로 정비를 분주히 해주고 있었다. 한국이 통일되는 날 전 세계 지구촌 문제가 해결된다는 함석헌 선생의 논평(論評)이 새삼 예감(豫感)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